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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에 치이고 조직에 차이는 땀내 나는 형사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0호 13면

에드 맥베인의 소설 『경관혐오』(1956) 표지 사진. 오른쪽은 1958년 영화로 만들어진 동명 작품의 포스터

한여름 밤의 거리. 건장한 사내가 뒤통수에 총탄 두 발을 맞고 쓰러진다. 87분서 소속 형사 마이크 리어던이다. 이건 겨우 시작이다. 그 뒤 동료 형사들이 잇따라 피살당한다. 누구일까. 복수의 화신이 된 전과자일까, 내키는 대로 총질을 해대는 살인마일까.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 87분서의 경찰들

에드 맥베인(1926~2005)의 『경관혐오』(1956)는 87분서 형사들의 연쇄살인을 다룬 작품이다. 이를 시작으로 87분서 시리즈는 2004년까지 56권이 나온다.주인공은 87분서의 경찰 공무원 집단이다. 무적의 영웅이나 명탐정이 아니다. 소시민이자 생활인으로서의 경찰이다. 그래서 현실적이다. 이들은 처음엔 좀스럽고 평면적으로 비친다. 하지만 사건이 이어지면서 풍부한 입체감을 지닌 캐릭터로 변모한다. 코트 자락 휘날리며 폼 잡는 사립탐정에 질린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갈아타 볼 만하다.

맥베인이 본 경찰서는 커다란 관료조직이다. 형사는 한 부품일 뿐이다. 형사들은 매일 출근해 각자 맡은 일을 한다. 서류를 만들고, 전화를 걸고, 사람을 만나고, 다른 서에 연락하고, 회의를 한다. 그러느라 중요한 사건에만 정력을 쏟을 수가 없다. 늘 새로운 사건으로 전화벨이 울려댄다. 사건을 골라 맡을 수도 없다. 관내의 숱한 범죄를 모두 다 처리해야 한다. 살인범을 쫓다가도, 소매치기를 조사한다. 신고가 들어오면 심야의 부부싸움도 뜯어말린다. 일이 번잡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형사들 사이엔 자조적인 신세한탄이 오간다. “형사과라고 해봤자 쓰레기 하치장 아닌가. …형사가 되려면 튼튼한 두 다리와 억센 고집만 있으면 돼. 다리가 있으니 시키는 대로 쓰레기통 뒤지며 돌아다니는 거고, 그러면서도 고집 때문에 이 짓을 못 그만두지.”
“그럼 머리는 필요 없다는 건가?”
“아주 조금만.”

이처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형사들의 애환이 스릴 넘치는 사건 속에 녹아 있는 게 경찰소설의 매력이다. 1970~80년대 드라마 ‘수사반장’을 기억한다면 그 재미가 어떤지 알 거다.

이 바닥의 효시는 1945년 로렌스 트리트(1903~98)의 『희생자의 V』다. 아니, 뜻이 통하려면 『희생자의 ㅎ』이 낫겠다. 그는 “경찰소설은 이래야 한다”고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품의 구성요소를 다 담아냈다. 가정문제로 고민하는 경찰관의 인간적인 모습, 경찰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 조직 내부의 갈등, 개인의 사명감과 조직 논리 사이의 괴리….

이어 경찰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작가는 영국의 존 크리시(1908~73)다. 그가 55년부터 J.J. 매릭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기디언 수사부장’ 시리즈는 경찰소설의 교본이다. 경찰이 맡은 개별 사건들이 하나하나 독립적 구성을 지니며 작품 전체를 떠받친다. 맥베인도 이 기법을 따랐다.

그런데 작가의 상상력이란 이리도 짓궂나. 『경관혐오』에서 형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곳은 범죄 현장이 아니다. 오히려 달콤한 휴식을 취해야 할 가정이다. 부인이 경관 혐오자가 돼 살의를 품다니, 도대체 뭘 어쨌기에. 그 답은 군데군데 나오는 심리묘사에 담겨 있다. 하기야 이게 어디 경찰만의 얘기겠나. 다들 조심해 살자.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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