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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⑭

그날의 황태장사는 예상보다는 신통치 않았다.

오전까지는 그렇게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드는가 하였더니, 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철규 역시 평소와는 딴판으로 좌판을 지키지 않고 장터구경을 핑계하고 곧잘 자리를 비우곤 하였다.

잠깐 좌판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꼴이 심상치가 않았다. 좌판에 덮개를 씌워 비설거지를 끝낸 뒤에도 한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태호가 동요할까 두려웠던 변씨는 즐겨했던 다방출입도 삼간 채 종일 좌판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철규는 똥 마려운 주막집 개처럼 한길과 좌판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조바심을 하면서 비가 긋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파장무렵에 드디어 그 여자가 나타났다.

시골장터에선 보기 드문 노란 색의 우산을 든 여자가 장터 초입길로 들어서는 순간, 변씨는 그 여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우산을 높다랗게 치켜든 채 한씨네 행중 좌판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턱만 보일 정도로 우산을 다시 내려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빗물이 고인 자리를 사뿐사뿐 비켜가면서 다가오는 그 여자의 태도는 매우 침착했다.

멀리서부터 그녀를 발견했던 변씨의 시선은 줄곧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비 내리는 날에는 걸맞지 않은 하얀 색의 등산화가 좌판 아래로 바싹 다가서 멈추었다.

그녀의 가벼운 걸음걸이에는 그러나 허황된 흥분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우산 가녘으로 내민 그녀는 좌판 뒤에 걸어둔 플래카드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강원도 해안 고성이 고향인 김경실의 '황태' 라는 시 전문이 적혀 있었다.

저 먼 알래스카나/물 좋은 동해안에서/간 밤 꿈길 사나운 탓에 코 꿰어/진부령에 실려온 나는/뼛골 시린 산골 물에 몸씻기 석달 열흘/별바라기 긴긴/겨울 이야기가 쌓여갈 쯤/칼날 바람에도 그럭저럭 이력이 나/마침내 영혼마저 맑아진 삭신/노릇노릇 황태로의 품위를 갖추고/술꾼들 안주상에 오르거나/숙취로 쓰린 새벽이면/홍두깨로 훔씬 두들겨 맞는/그렇게 고달픈 한 생애가/한 그릇 따끈한 국으로 남는 날/물빛좋은 동해안이나 알래스카 쯤에서/바다빛 건강한 어부 손에/꿈 잘못 꾼 탓에 코 꿰일/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그제서야 얼굴을 우산 밖으로 환히 드러낸 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한철규씨 오늘은 안 나오신가보죠?" "아녜요. 나오셨어요. " 여자의 말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태호가 냉큼 되받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흥정을 붙이려는 고객도 없었기 때문에 태호 역시 그녀의 출현을 멀리서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힐끗 주변을 돌아보며 망설이는 듯했다.

태호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 안면 있으시죠?" "물론이에요. 안녕하셨어요? 못 알아볼까 인사 안드린건데…. " "한선배 조금만 기다리세요. " 그러나 그때 벌써 철규는 좌판에 나타나 있었다.

찾고 있던 장본인이 나타났는데도 여자는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가벼운 목례를 나누었을 뿐 호들갑을 피우지 않았다.

자판기 커피 마시러 오셨군요. 철규는 그렇게 말하며 길 맞은편 쪽으로 걸어갔고 그녀가 뒤따랐다.

흡사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두 사람의 행동에는 전혀 서먹서먹한 구석이 없었다.

자판기 투입구로 동전을 떨어뜨리면서 철규가 물었다.

"그 이후 사뭇 그 호텔에 묵고 있었군요. " "아녜요. 그날 이후 몇 달 만에 처음 왔는걸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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