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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실직자 지원사업 활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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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종교계가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하의 대량 실직사태를 계기로 몇 가지 새로운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기독교 등이 최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실직자 지원사업은 종교사회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지원사업의 규모와 내용을 살펴보면 전국적으로 1백여개 프로그램에 숙식제공.쉼터제공.취업알선.심리상담 등 다양하다.

사찰과 교회를 개방하거나 별도의 건물을 마련해 쉼터와 취업정보를 제공하고 점심.음료 등을 무료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교계 실업자 구원프로그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직자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심성 (心性)치유다.

원래 종교는 본질적으로 정신문제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들의 절망감과 심리적 불안정.자신감 상실.소외감 등을 어루만져 주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이는 정부나 공공기관.일반의 실업대책이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이제 모든 것을 외부에서 구하려던 자세를 버리고 내 자신의 내부에서 구하기로 했다.

원래 불안이나 위기란 그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고나니 용기가 솟아난다.

" 불교 조계종 전남 장성 고불총림 (古佛叢林) 백양사의 실직자 참선교실 (4박5일) 을 마치고 써낸 서울 한 시중은행 대리 출신 K씨의 감상문 내용이다.

종교계 실직자 구원프로그램은 이처럼 실업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특수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계의 실직자 지원사업은 여러가지 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첫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다가갔던 부처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모습이다.

불교와 천주교.개신교 등은 최근 범교단.개사찰.개교회 차원의 다양한 실직자 구원프로그램을 통해 실업자를 돕는 적극적인 물심양면의 지원에 나섬으로써 모처럼 활기찬 종교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가 언제 이처럼 하나같이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플 수밖에 없는 '동체대비 (同體大悲)' 와 낮은 데로 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을 보여 준 일이 있었던가.

물론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과 6.25전쟁중의 구호사업 등에서 불교.기독교 등이 기여한 바를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실직자 구원활동처럼 정서적 지원을 통해 심리적 안정.자긍심 고취.소외감 극복 등을 돕는 평상심 속의 영적 (靈的).사회적 구원은 아니었다.

둘째는 각 종교안에 내재해 온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해소되면서 '하나' 가 되는 모습이다.

종교계는 특히 과거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나 노동선교 등을 둘러싸고 성직자의 제사장적 사명에 입각한 개인구원과 예언자적 사명을 따르는 사회구원중 어느 것이 앞서야 하느냐를 놓고 심각한 대립을 보여왔다.

그러나 최근의 실직자 구원은 영적.개인적 구원과 육체적.사회적 구원이 동시에 다 포함되는 내용이어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실직자 구원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라는 장벽을 넘지못하던 기독교의 에큐메니컬 (교리일치) 운동에 다시 없는 '교회가 하나되는 기회' 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의 경우는 현실참여를 통한 사회제도 (社會濟度)가 미약하다는 그동안의 비판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는 앉아서 '받는 종교' 가 아니라 나가서 '주는 종교' 라는 새로운 교회상과 사찰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종교는 6.25이후 세계 유례가 없는 신앙열풍을 타고 요원의 불길처럼 성장해왔다.

특히 70~80년대의 경제개발 붐에 편승한 종교의 물량주의와 팽창주의는 종교 귀족화.호화성전 등과 같은 저차원의 세속화 현상을 빚어내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귀족화한 성직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신자들의 헌금과 시주를 절까지 얹어서 받는데 익숙해지면서 베풀고 주는 삶과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이렇게 돼 종교의 본질인 '주는 삶, 나누는 삶' 의 공동체 모습은 좀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종교계의 실직자 구원은 '받는 자' 의 모습으로만 굴절돼 있던 한국 종교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종교 본래의 모습인 '주는 자' 의 상 (像) 을 새삼 각인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직자 수는 4월말 현재 1백43만명, 연말에는 2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같은 대량 실업문제는 잠재적인 '사회폭동 요인' 으로까지 우려되는 현실이다.

95년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에서 보듯이 사회 소외계층의 분노가 사교 (邪敎) 를 통해 폭발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물질적 지원 중심인 정부당국의 실업대책이 해결할 수 없는 심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종교계의 실직자 구원이 절실히 요망되는 시점이다.

보다 깊이와 넓이를 더한 종교계의 실직자 지원사업이 활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이은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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