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공호흡기 떼자 할머니 뺨 위로 눈물 한 방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23일 오전 10시20분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본관 1508호실. 여성 6명이 고개를 숙인 채 병실 문을 나섰다. 눈은 벌겋게 부어있었고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뒤로 한 21.4㎡ 크기의 병실에는 김모(77·여)씨가 누워 있었다. 유동식 공급 호스와 기계와 연결된 호흡기를 각각 코와 입에 끼고 있었다. 얇은 이불을 목까지 덮은 상태였다. 그러나 머리는 곱게 뒤로 벗어 넘겼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김씨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의료진과 김씨의 아들·사위 등 가족과 김천수 서부지법 부장판사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23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김모 할머니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기 전에 의료진과 관계자들이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다.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이후에도 자발 호흡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분 뒤 김씨의 주치의 박무석 교수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겠습니다”고 말한 뒤 김씨의 입에 있던 호흡기를 떼어냈다. ‘연명장치’가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김씨가 숨을 몰아 쉬었다. 비스듬히 놓인 뺨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지켜보던 가족들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앞서 이날 김씨는 오전 9시쯤 그동안 인공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던 9층 중환자실에서 15층 1인실로 옮겨졌다.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 전 딸·사위 등 가족들과 1심에 재판을 맡은 서부지법 김천수 부장판사가 참석한 가운데 임종 예배가 있었다. 예배 동안 김씨의 발이 움찔하듯 조금 움직였다. 딸들은 어머니의 발을 계속 주물러댔다. 예배 후 가족들은 ‘어머님 은혜’를 불렀다.

“엄마… 아…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천국에 가서 아버지도 만나고…행복하게….”

작별인사를 건넨 딸과 며느리·손녀 등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 직전 병실을 나왔다.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에서 존엄사 인정 판결을 받은 김씨의 인공호흡기가 제거됐다. 김씨는 16개월 전 이 병원을 걸어서 들어왔다. 폐암 여부를 확인하는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가족들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소송을 냈고,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인공호흡기를 떼어 낸 이후에도 김씨는 자발 호흡을 하고 있다. 김씨는 인공호흡기를 장착했을 때의 분당 호흡수가 12회였다. 정상인의 호흡수는 16~18회다. 그러나 이날 인공호흡기 제거 후 김씨는 22회로 가쁜 숨을 쉬었다. 그러다 오전 11시쯤 19~20회 정도로 내려갔다.

“호흡이 유지되는 한 다른 의료적인 조치는 계속할 계획”이라는 게 의료진의 설명이다. 대법원의 선고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것이어서 김씨는 현재 영양 공급을 평소처럼 받고 있다.

박무석 교수는 “김 할머니의 혈압이 호흡기 제거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고 자발 호흡도 계속하고 있다”며 “폐렴·욕창 등 다른 문제도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호흡기를 제거하고 30분~1시간 이내에 사망하는 경우도 많지만 자발 호흡이 유지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의식 회복 가능성에 대해선 “뇌의 손상이 심해 힘들다고 본다”고 전했다.

이날 가족들은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씨의 큰사위인 심치성(49)씨는 “비통하고 마음의 커다란 의지처가 사라진다는 것에 천붕지괴(天崩地壞·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정도로 슬픔)에 빠져 있다”고 가족들의 심정을 전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같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란다”며 “법률적이고 의학적으로 대책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김씨가 자발 호흡을 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심씨는 “저희의 입장은 원래부터 돌아가시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호흡기를 떼고 치료를 받겠다는 것”이라며 “좋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 측 변호인인 신현호 변호사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서 고통이 줄었고 혈색이 좋아졌다”며 “연명치료가 환자에게 고통을 줬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라고 말했다.

장주영·이정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