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엔화폭락과 '꿀벌'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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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배후에는 꿀벌이 있다" 고 했더니 모두 무슨소리냐는듯 조용해졌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일본인이 꿀벌처럼 열심히 일하고 소비하지 않는 것은 마이크로 레벨에서는 미덕 (美德) 이겠지만 매크로 레벨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갭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갭의 크기만큼 불황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해외로 전가시켜 무역흑자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나라의 무역적자가 되며 그 적자는 결국 외채로 메울 수밖에 없고 따라서 무역적자의 누적을 반영한 외채누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꿀벌이 벌어들인 무역흑자는 부동산에 투기돼 거품경제를 낳았으나 거품이 꺼지자 부동산과 연계된 주가폭락과 함께 은행이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게 돼 은행노릇을 못하게 됐다.

결국 꿀벌경제는 밖으로 동아시아 제국의 무역적자누적과 함께 안으로 장기불황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경제의 펀더멘털의 저하는 엔저 (低) 현상을 가져오고 엔저는 중국의 위안화의 평가절하를 가져오고, 다시 동남아의 평가절하에 이어 한국원화 평가절하를 가져오게 했다.

일본꿀벌이 벌어들인 재팬머니는 무역메커니즘과 관계없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제국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차입경영을 조장하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리고 차입경영의 누적이 위험신호가 돼 어느날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고, 그것이 도화선이 돼 무역적자 누적과 차입경영 누적을 합친 규모의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일본의 꿀벌경제는 삼중메커니즘을 통해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와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준에서 수습되는 것이 아니고 엔저가 가속돼 8일 도쿄 (東京) 외환시장에서 1백40엔 수준으로 떨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매입 경향이 지속돼 머지않아 1백50엔 이상으로 폭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안게 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러한 엔저를 미국과 일본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서로 즐기는 경향이 있고 그대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선 제2의 환란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미.일간 금리격차는 지금 최저 4.6% 수준으로 확대돼 미국에의 자금집중이 심화되고 그것은 미국경제의 팽창에 박차를 가하면서 '강한 달러' 를 지속시켜준다.

아울러 일본으로선 수출증가와 디플레 압력의 완화라는 메리트를 갖게 된다.

엔화가치가 1엔 하락할 때마다 도요타 자동차의 이익이 1백억엔씩 늘어난다는 계산이다.

이러한 메리트 때문인지 파리에서 9일 열린 서방선진7개국 (G7) 재무장관회의에서 일본 엔저문제는 중요의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일련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면 엔화의 적정수준은 달러당 1백10~1백20엔 정도다.

제조업의 총노동코스트를 달러베이스로 비교해도 달러당 1백30엔 수준이다.

이것을 초과하는 엔고 (高) 는 미국경제의 거품이 되고 일본경제로서도 구조적으로 마이너스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저행진이 가속되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의 위기탈출에 결정적인 저해요인이 된다.

한국의 위기탈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출증가에 의한 무역흑자가 필수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멕시코위기때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이 수입수요를 증가시키면서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흡수해주어야 하는데 정반대로 엔저로 한국 등의 수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자국의 수출증가에 박차를 가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엔의 폭락이 이미 수출부진에 허덕이는 중국에 압력을 가해 위안화의 평가절하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동남아 각국의 평가절하로 이어진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경제의 몰락으로 일본경제도 걷잡을 수 없는 공황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결국 미국경제의 공황을 가져온다.

이것이 소위 '일본발 세계대공황론' 의 시나리오지만, 그 배후에 있는 것은 바로 '꿀벌' 신화다.

김영호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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