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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색소폰 전성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지난달 14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 기념식에 참석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바로 2차대전 직후 소련의 봉쇄를 뚫고 감행한 미군의 베를린 공수 (空輸) 50주년 기념식장이었다.

의장대를 사열하던 그는 군악대원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금빛나는 색소폰이었다.

지금 백화점이나 엘리베이터.카페, 심지어 CF에서 케니 G가 들려주는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 '모멘트' 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레이티스트 히트' 앨범은 발매 4주만에 플래티넘 (판매고 10만장) 을 기록했다.

바야흐로 색소폰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이 92년 아칸소 주지사 시절 TV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 대선을 승리로 이끈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색소폰에는 젊고 대중적인 이미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빌딩 숲과 네온사인이 찬란한 야경 (夜景) 을 바라보면서 힘든 하루 일과를 끝낸 후 즐기는 휴식 시간에 어울리는 도회풍의 음색이 안락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색소폰을 재즈나 팝의 전유물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처음에는 비제.베를리오즈 등 클래식 음악가들이 관심을 가졌고 재즈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색소폰은 1841년경 발명돼 1856년 3월1일 프랑스 특허국에 '출생신고' 를 마쳤다.

색소폰이라는 이름은 발명자인 벨기에 태생의 악기제조업자 아돌프 삭스 (1814~94)가 자기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 색소폰은 1백50여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재즈 뿐만 아니라 록.팝.클래식 등 전 음악장르에 걸친 '크로스오버' 악기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클래식 분야의 현대 작곡가들까지 색소폰 협주곡을 발표해 젊은 청중들을 음악회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클래식과 팝을 아우르는 폭넓은 적응력에다 개성있는 음색까지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드는 클라리넷, 악기 모양은 오보에, 재질은 금관악기를 닮은 이 '튀기 악기' 는 군악대에서 금관악기의 음량에 압도돼 맥을 못추고 있는 목관악기를 보완해주기 위해 고안된 것. 그래서 색소폰은 처음부터 크로스오버의 성격을 띠고 태어났다.

음역에 따라 소프라리노.소프라노.알토.테너.바리톤.베이스.콘트라베이스.서브콘트라베이스 등 여덟 종으로 구성된 '악기 가족' 으로 금관악기의 정열적인 음색과 현악기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벨벳 사운드' 로 날카로운 음색의 대립을 감싸안는다.

그래서 '야외음악회의 바이올린'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오늘날 같은 인기를 구가한 것은 아니다.

색소폰이 맨 처음 포함된 최초의 관현악곡은 카스네의 '유다의 마지막 왕' .그러나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교향곡 등 정규 악기편성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이미 오케스트라의 진용이 갖춰진데다 너무 튀는 음색 때문에 앙상블을 방해한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비제의 '아를의 여인 모음곡' 에 등장하는 알토 색소폰 독주가 유명하며 라벨의 '볼레로' 에서는 소프라리노와 테너 색소폰 등 2대가 등장한다.

이밖에도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파리의 아메리카인' , 쇼스타코비치의 발레음악 '황금시대' , 코플랜드의 '피아노협주곡' , 미요의 '세계의 창조' , 프로코피예프의 '키제 중위' '로미오와 줄리엣' , 알베니스의 '이베리아'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정 교향곡' , 오네게르의 '화형대 위의 잔다르크' , 푸치니의 '투란도트' , 드뷔시의 '랩소디' 등에 색소폰이 사용되고 있다.

협주곡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글라주노프의 '색소폰 협주곡' .색소폰의 예술적 차원을 높인데 크게 기여한 독일 태생의 지거트 라세 (91) 의 위촉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콘체르티노 다 카메라' 를 발표한 자크 이베르를 비롯, 프랑 마르탱.피에르 벨로네.에사 페카 살로넨.필립 글래스.마이클 카멘.루카스 포스.존 애덤스 등 현대 작곡가들이 앞다투어 색소폰 협주곡을 발표하고 있다.

'군중 속의 고독' 을 즐기면서 '자기 목소리' 를 찾아가는 현대인의 이미지와 손잡고 구가하는 색소폰의 시대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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