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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에게 딸 시집 보내고 빚더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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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로비자금으로 거액 사용 … 베이징 도피생활 하다 세상 떠나”
조선 개화기 100가지 경제풍경 - ‘빚의 제왕’ 윤택영
전봉관의 근대사 가로보고 세로읽기

이코노미스트 1906년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여러 집안에서 자기 집안 여인을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앉히기 위해 각축을 벌인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동궁계비에 간택된 여인은 윤택영의 셋째 딸 윤씨. 13세 어린 딸을 황태자에게 시집 보낸 후 윤택영은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움켜쥐지만, 뜻하지 않은 시련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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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영의 셋째딸 순정효황후. 1906년 순종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겉보기에 윤택영은 운 좋은 사내였다. 1876년생인 그는 1874년생인 황태자 순종보다 두 살이 적었지만,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장인은 장인이었다. 더욱이 셋째 딸이 태자비에 책봉된 지 1년 만에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에 등극했다.

헤이그 특사 문제로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사실상 쫓겨난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윤택영에게는 크나큰 경사였다. 불과 32세에 황제의 장인이 된 윤택영은 ‘해풍부원군’에 책봉되어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움켜쥐었다.

만일 고종이 자리를 지켰더라면, 12년 후에야 찾아올 영예였다. 갑자기 친구도 많아졌고, 집을 찾는 손님도 부쩍 늘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국정의 태반은 통감부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정작 윤택영이 처리할 나랏일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울뿐인 감투를 쓴 윤택영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은 밤낮없이 분주했다.

그들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는 이틀에 한 번꼴로 어김없이 벌어졌고, 저녁 무렵 시작된 연회는 새벽녘에야 파했다. 윤택영은 33세 젊은 나이에 몇 달씩 몸져누울 정도로 2년을 질펀하게 놀았다. 국구(國舅: 황제의 장인)의 권세를 부리며 몸에 병이 날 정도로 세상 모르고 놀던 윤택영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바로 빚이었다.

셋째 딸을 태자비로 앉히기 위해 황실을 상대로 과도하게 지출한 ‘로비 자금’이 화근이었다. 그가 로비 자금과 결혼식 비용으로 쏟아 부은 돈은 무려 50만원. 당시 서울 시내 고급주택 한 채 가격이 1만원 남짓이었다.

황실 상대 로비로 빚더미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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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의 국장. 6·10만세운동을 촉발시켰다.
웬만한 돈이었다면 참봉 첩지라도 팔아 메웠겠지만, 워낙 큰 빚을 진지라 벼슬 팔아 100원씩, 1000원씩 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고관대작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놀다가도 귀가하면, 집 앞에는 어김없이 빚쟁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빚쟁이들의 성화에 놀아도 즐거운 줄 몰랐고, 권세를 부려도 뿌듯한 줄 몰랐다. 아무리 나라가 몰락해 간다 해도 황제 장인은 지엄한 존재였다. 처음엔 빚쟁이들도 황제 장인 위세에 눌려 돈을 돌려줄 것을 점잖게 부탁했다.

하지만 윤택영이 아무 대책도 없이 채무 상환을 차일피일 미루자, 빚쟁이들의 말투가 점차 거칠어졌다.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윤택영은 예사 사람 같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채무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황제인 사위에게 자기 빚을 대신 갚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500년 사직이 오늘 망할지 내일 망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마지막 황제 순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돈 달라고 보채는 철면피 장인 등쌀에 시달렸다. 순종은 효심이 아니라 남 보기 부끄러워서라도 장인 빚을 갚아 주고 싶었지만 50만원은 한 나라의 임금이라도 갚기 어려운 거금이었다.

황실에서 빚을 대신 갚아주지 않자 윤택영은 일본에 손을 벌렸다. 하지만 사위도 안 갚아주는 빚을 일본이 대신 갚아줄 리 없었다. 윤택영은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 않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황실과 통감부를 찾아가 자기 빚을 대신 갚아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윤택영은 빚쟁이에게 끌려가 법정에 서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윤택영이 황실과 통감부를 상대로 채무 해결 운동을 벌인 지 1년 만에 채무를 일거에 청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호시탐탐 국권을 노리던 일본이 ‘한일병합’을 단행한 것이다. 윤택영은 황실의 외척으로 ‘한일병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봉작되었고, ‘은사공채’(恩賜公債: 한일합방 ‘유공자’에게 총독부가 내린 사례금, 매국공채) 50만4000원을 받았다.

그가 받은 ‘은사공채’는 왕족 이강, 이희가 받은 83만원 다음으로 많았고, 귀족 중에는 가장 많았다. 하지만 ‘은사공채’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윤택영은 그때까지 알려진 50만원보다 몇 배나 많은 부채를 안고 있었다. 채무 반환 소송이 줄을 이었고, 재산 압류와 강제집행이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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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황태자 시절 순종의 결혼식. 비용 대부분을 윤택영이 빚을 내 부담했다.

일본왕이 하사한 화병, 고종이 하사한 친필서첩 등 당시로서는 값을 따지기 어려운 귀한 물건에도 차압딱지가 더덕더덕 붙었고, 아내의 옷가지까지 경매에 부쳐지는 수모를 겪었다.

1911년 윤택영의 집에 차압딱지를 붙인 집달리는 그의 재산이 300원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듬해 윤택영은 4만원을 차입해 집 수리 공사에 퍼부었다.

빚을 지고, 호화사치 생활로 탕진하고, 차압 들어오고, 경매 당하고, 또 빚을 지고, 또다시 탕진하는 악순환은 10년을 두고 이어졌다. 몇 천원씩 집행 당한 경매가 수십 차례 이어졌다.

자신의 빚이 얼마나 되는지는 윤택영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300만~800만원 정도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될 뿐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채무자였던 윤택영에겐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 ‘대채왕(大債王)’ 등 치욕스런 별명이 따라다녔다.

1920년 여름 빚, 소송, 차압, 경매에 10여 년 동안 시달리던 윤택영은 큰아들 윤홍섭, 중국어 통역관, 경호원을 데리고 여행을 핑계로 베이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거물급 인사의 출국 장면이 으레 그러하듯, 총독부와 황실에서 사람을 보내 일행의 장도를 배웅했다. 하지만 윤택영이 베이징으로 건너간 진짜 이유는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윤택영은 1920년 6월 한 달 동안에만 10차례나 경매처분을 당했다. 그러한 수모를 당하고도 남은 빚이 수백만원에 달했다. 윤택영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인을 시켜 재산을 정리한 후, 소위 ‘빚잔치’를 하고 채무를 탕감 받기 바랐지만 채권자들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베이징에서 발이 묶였다. 채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는 귀국할 수 없는 신세였다.

베이징으로 도주하기 전 윤택영, 윤홍섭 부자는 쓰러져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평생 남의 돈을 끌어다 쓸 줄만 알았지 땀 흘려 돈을 벌어 본 적 없는 윤택영 부자가 사업에 성공할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두 부자가 움직일 때마다 오히려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윤택영은 뚝섬 땅콩 농장 경영에 실패한 후 신설되는 해동은행에 대주주로 참여하려 했지만 주식 대금을 빌리지 못해 망신만 당했다. 윤홍섭은 아버지의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 미두(米豆) 투기를 통한 일확천금이라 생각하고, 미두 투기에 나섰다가 공연히 집안 빚을 걷잡을 수 없이 늘려놓았다.

채무왕의 귀환

중국 도피생활 7년째 되는 해,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평생 순종의 속만 썩인 윤택영이었지만, 신하로서 또 장인으로서 순종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윤택영은 7년 전 경성역에서 총독부와 이왕직 직원의 영접을 받으며 위세 좋게 출국하던 때와는 달리 혹시 빚쟁이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지나 않을까 우려해 창덕궁 코앞에 있는 경성역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문산역에서 내려 먼 길을 돌아 첩보작전 하듯 몰래 입국했다. 윤택영은 국장 기간에 창덕궁에 칩거하면서 빚쟁이들과 막후협상을 벌였다.

협상이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자, 윤택영은 또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베이징으로 도주했다. 윤택영이 창덕궁 내전을 찾아가 황후에게 멀리 가겠다는 뜻을 전하자, 황후는 석 달 전 남편을 잃은 데다 부친과 또다시 생이별할 생각을 하니 서러움에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베이징 도주를 감행한 지 2년 후인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은 윤택영에게 파선선고를 내렸다.

그날부로 총독부는 윤택영의 후작 작위를 박탈하고, 귀족 예우를 중지했다. 윤택영은 두 번 다시 고국산천을 밟지 못하고, 1935년 어느 스산한 가을날, 베이징의 허름한 병원에서 임종을 지키는 가족 하나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윤택영의 부고를 접한 윤치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윤비의 부친 윤택영씨가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돈 욕심이 지나치지만 않았던들 조선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는 빚이 수백만원에 이를 때까지 은행과 개인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꾸었으며, 빚쟁이들을 피해 줄행랑을 쳐서 지난 10년 남짓 베이징에서 살았다. 빚쟁이들이라면 몰라도, 그의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손해날 일은 아니다.”

베이징 도주한 윤택영에 돈 받으러 가면서 해동은행 돈 횡령

심상익 횡령 사건

왼쪽부터 윤택영, 그의 모친, 그의 형 윤덕영.

해동은행(海東銀行)은 1920년 조선 귀족이 주축이 되어 자본금 50만원으로 설립되었다. 윤택영은 창립 발기인이자 대주주로 해동은행 설립에 참여했지만, 주식을 배정받고도 주식 대금을 납입하지 않은 채 중국으로 도주했다.

주주들은 해동은행 전무이자 윤택영의 측근인 심상익을 베이징으로 보내 미납한 주식 대금을 받아오게 했다. 대한제국 시절 ‘제국신문’ 발행자였던 심상익은 고관대작의 연회에 기웃거리며 정관계에 인맥을 넓힌 윤택영의 심복이었다. 심상익은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수십만원의 은행 돈을 횡령해 도주했다.

주주들은 심상익의 은행 돈 횡령사건에 윤택영도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믿었다. ‘심상익 횡령사건’을 계기로 윤택영은 ‘악성 채무자’에서 ‘사기·횡령범’으로 죄질이 나빠졌다. 해동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윤택영의 형 윤덕영은 초대 사장에 내정되었지만, 동생이 수백만원의 채무를 지고 해외로 도주하고, 자신 또한 고종황제 국장 때 ‘분참봉 첩지 위조사건’의 주동자로 검찰수사를 받아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낙마했다.

‘분참봉 첩지 위조사건’은 고종황제 국상 때 장례식을 주관하는 임시직 관리인 ‘분참봉’에 임명한다는 첩지를 다량으로 위조해 ‘양반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선전하며 팔고 다니다가 꼬리를 잡힌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전봉관·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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