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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짝짓기 떠도는 루머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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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몇몇 대형 '선도은행 (리딩 뱅크)' 구축을 통해 은행산업을 재편하겠다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발언 이후 시중은행들이 생존을 위한 필사의 '짝짓기' 경쟁에 나서면서 루머홍수 사태를 빚어내고 있다.

진위를 가리기 힘든 은행간 인수.합병 (M&A)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가 하면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한 설익은 M&A 방침을 서둘러 공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대체로 자기방어나 일방적 짝사랑, 또는 면피성 발표에 그칠 가능성이 큰 각종 합병설이 난무할 경우 결국 해당 은행과 금융권 전체의 공신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은행근로자와 예금자.주식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몰아치기식 졸속 합병추진은 벌써부터 그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 하나.보람 합병설 = 금융당국 고위층이 우량은행끼리의 자발적 합병사례가 하나쯤 터져나올 것을 강력히 원하고 있는 가운데 보람은행이 하나은행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나섰다.

3일 국제금융공사 (IFC) 와의 합자를 확정발표한 하나은행은 보람과의 합병설에 대해 3일 "공식적으로 합병제의를 받은 적이 없다" 는 조심스런 반응이지만, 보람은행은 "하나은행과의 합병을 실무차원에서 검토한 일이 있다" 고 합병설을 부인하지 않는 등 좀더 적극적 입장이다.

특히 보람은행 관계자는 "후발 우량은행과의 합병으로 대형화해 선도은행으로 부상한다는 매킨지의 조언을 토대로 하나.한미.장기신용은행 등을 제휴대상으로 검토했다" 면서 "투자금융회사에서 은행으로 전환했다는 태생 (胎生) 배경이 같고 합병 이후 조직융화가 비교적 잘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고 덧붙일 정도로 오히려 합병설이 공론화됐으면 하는 의중을 은근히 내비쳤다.

하지만 설사 합병 협의가 가시화하더라도 보람은행은 1대1 합병을, 하나은행은 현재 발행주식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할 때 3대1 정도의 합병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어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 신한.조흥 합병설 = 금융감독위원회가 미래의 슈퍼은행 가능성이 가장 큰 은행으로 신한은행을 지목하면서 선발 시중은행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최근 신한은행이 설립후 처음 전직원의 10%에 가까운 4백20명을 명예퇴직으로 내보낸 일도 합병을 위한 몸집 줄이기란 해석이 그럴 듯하게 제기됐고 같은 유니시스 기종을 은행전산망으로 쓰고 있다는 점도 전산시스템 통합의 유리한 점으로 지적됐다.

하나.보람은행의 경우와 사뭇 다르게 두 은행은 합병설에 대해 펄펄 뛰고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부실자산이 상대적으로 많은 선발 시중은행과 합병하는 게 실익이 없을 뿐 아니라 급여.승진체계 등이 판이해 시너지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고 설명했다.

◇ 성급한 인수.합병 발표 = 이에 앞서 2일 상업은행은 "지방 우량은행 2, 3곳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고 공식발표했다.

하지만 밀실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 추진돼도 성사될까 말까 한 M&A 계획을 앞장서 공개한 데 대해 전문가들은 의아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로펌 (법률회사) 소속 한 변호사는 "설익은 합병설이 미리 떠돈 합병치고 제대로 된 일이 드물다" 면서 "특히 상대방에 의사타진도 제대로 하지 않은 합병설을 합병주체가 앞장서 퍼뜨리는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지방은행들의 거센 항의가 터져나오자 상업은행 고위관계자는 "금감위에 제출한 경영정상화 계획안에 포함된 내용으로 아직 지방은행에 합병의사 타진을 하지 않은 상태" 라고 한발 빼 합병발표 내용이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졸속으로 마련된 것임을 인정했다.

한편 지방은행들은 자칫 피합병 은행으로 오인될 경우 예금인출 등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발끈하고 있다.

특히 지방은행들은 대형은행들의 인수.합병설이 나올 때마다 약방의 감초식으로 자신들이 거론되는 데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광주.대구.전북은행 등 지방은행들은 3일 여신.기획부장단 회의를 열고 앞으로 대형 시중은행의 무책임한 지방은행 인수.합병추진에 공동대응한다는 방침을 정하기도 했다.

◇ 근거없는 소문 난무 = '슈퍼은행' 방침이 나온 뒤 지난달 말부터 조흥.상업.한일은행중 두곳, 아니면 세곳 모두를 합병하도록 당국이 유도할 것이라는 소문이 금융가에 나돌아 해당 은행들이 진화에 진땀을 흘렸다.

해당 은행들은 "외형이나 영업내용이 엇비슷한 은행을 수평 결합해 봐야 무슨 실익이 있겠느냐" 고 어이없어 하고 있다. 이밖에 크고 작은 합병설이 여기저기 난무하자 은행원들은 아예 일손을 놓은 채 불안해하고 있고 흡수합병 대상 은행으로 거론된 은행들의 예금주들이 동요하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합병설의 대상이 된 조흥.상업.보람은행 주가가 상한가를 치는 등 합병 소문에 따라 은행주가가 춤춰 투자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홍승일.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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