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서러운 바겐세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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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외국자본이시여, 제발 한국 기업들을 사주십시오. " 한국 경제의 필사적 바겐세일이 시작됐으나 판매실적이 영 신통칠 않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통사정해도 좀체 진척이 없다.

외국인주식투자 한도를 늘렸으나 외면의 눈길은 여전히 차갑다.

참으로 안타까운 지경이다. 사실 나라경제가 엉망이 되니까 자존심 상하고 아니꼬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칼자루를 쥐었다고 모든걸 자기들 식으로, 자기들 이익 위주로 해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외국 언론들은 한국 경제위기를 폭로한 '공로' 를 내세워 기세등등이다.

외신특파원들은 어느새 최고의 한국 경제전문가가 돼버렸다. 외신기사 한줄에 주가와 환율이 요동을 친다.

외국의 컨설팅 회사들도 문전성시 (門前成市) 다. 정부당국이건 민간기업이든 '어찌하오리까' 를 물어오는 일거리가 하도 몰리는 바람에 하청에 재하청을 주면서 큰 돈을 벌고 있다.

신문스크랩이나 오려서 짜깁기 보고서를 만드는 엉터리들까지 특수 (特需) 를 누리고 있다. 옳든 그르든 이들의 진단과 처방은 한국 경제에 교과서 행세를 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외국자본가들의 투자 여부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면, 한국 언론들마저 대서특필로 베끼기 경쟁이다. 지금 이 마당에 개방론을 둘러싼 시비 따위는 무의미해졌다.

달러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하는 급박한 현실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요 몇달 사이에 엄청나게 큰 변화를 겪어왔다.

그토록 반대하고 미뤄왔던 것들을 눈깜짝하는 사이에 몽땅 풀어주고 터줬다.

경제국방의 최후보루로 여겨 왔던 외환관리법은 빈껍데기만 남았고, 죽어도 안된다고 버티던 적대적 인수.합병 (M&A) 까지 허용해준 마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자본은 입질만 할 뿐 선뜻 들어오질 않는다.

별의별 시비를 다 건다. 기업장부를 못 믿겠다, 땅값을 절반으로 깎아라, 정리해고를 보장하라, 심지어는 노조를 없애라는 요구까지 해 온다.

당장 계약을 치를 듯이 덤벼들다가도 하반기에 보자며 발을 빼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목을 조를대로 졸라 값을 더 후려치겠다는 계산에서다.

최근 독일은행 돈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외환은행도 막판까지 혼쭐이 났다. 경영참여나 지분조건 등 상대방 원하는대로 다 들어주기로 했건만, 막판에 마음이 변해 하마터면 백지화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처방과 요구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싫으면 그만두라" 니 다른 선택이 없다. 답답한건 우리쪽이다.

더구나 우리 자신의 과욕과 허풍으로 망조가 들었으니 누굴 탓하랴. 물론 외국 시각이라고 다 옳은건 아니다. 구조조정속도에 대한 비판만 해도 그렇다.

국제통화기금 (IMF) 측의 최근 평가는 방향이나 속도에 만족한다는 입장이다. 너무 몰아치다간 한국 경제기반 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 투자로 손해본 외국투자자들은 "뭘 하는거냐" 며 비난을 퍼부어댄다. 요즘 한창 뜨는 증권분석가 스티브 마빈은 한국 정부를 '미치광이' 라고까지 매도한다.

그런가 하면 부실기업정리 시한이 밝혀지자 불안요인이 다시 커졌다고 외신은 야단을 떤다. 구조조정을 안하면 안한다고 쥐어박고, 하면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작용에 놀라 큰일났다고 흔들어댄다.

속상해도 어쩔 수 없다. 물론 구조조정을 게을리해 온 귀책사유는 어차피 우리에게 있다. 그리하여 외부강요로 시작된 개방이요, 구조조정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들에게 마냥 끌려다닐 순 없는 일이다. 방책은 한가지. 험한 꼴 그만 당하려면 무슨 수모를 겪더라도, 알짜기업들을 몽땅 내주는 일이 있더라도 경제를 살려놓고 봐야 한다.

공장이 안돌고 실업자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무슨 주장인들 힘이 실리겠는가. 서럽지만 꾹꾹 참으면서 외자 끌어들이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한국 경제의 현주소는 구제금융으로 연명하는 신세가 아닌가.

이장규<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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