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00㎞ 역주행 참사 한 달 …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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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경찰서를 취재하던 기자는 한 경찰관으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택시가 느닷없이 도로를 역주행하다 가드레일 등을 들이받아 3명이 숨졌다고 한다. 당시 택시의 속도가 시속 100㎞ 이상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사건기자의 본능이 발동했다. 사고 현장을 찾아가 봤지만 그날 새벽 사고가 일어나 현장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경찰서 교통사고조사계를 찾아갔다. 경찰이 설명한 사고 개요엔 이해 못할 구석이 많았다.

사고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달 19일 0시30분, 서울 대치동 한티역 네거리. 선릉역에서 도곡역 방향으로 가던 택시 한 대가 이상한 질주를 시작했다. 1차선에서 진행하던 택시는 교차로에 이르러서도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차량 3대의 왼편 중앙선을 넘었다. 택시는 교차로를 통과해서도 중앙선을 다시 넘어 오지 않고 급가속을 내며 역주행을 계속했다.


주변 사람들은 택시가 내는 굉음에 놀라 시선을 집중했다. 만만치 않은 경사의 오르막길이었지만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치고 올라간 택시는 갑자기 왼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더니 인도에 설치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엄청난 속력과 충격에 택시는 제어능력을 잃고 튕겨져 바로 옆 아파트단지 정문으로 돌진했다. 택시는 다시 전신주를 들이받은 후 정문 옆 돌기둥과 잇따라 충돌하고서야 질주를 멈췄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택시는 충격을 못 이겨 두 동강 나 있었다. 운전기사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 숨져 있었다. 조수석과 뒷자리에 탄 2명의 승객은 차 안에서 즉사한 상태였다. 급가속으로 인해 생긴 타이어 자국(일명 요마크)은 교차로 끝부터 사고 지점까지 50여m나 길게 나 있었다.

사고 조사에 나선 경찰은 우선 제동장치 결함 등 차량 문제로 보고 사고 원인을 추적했다. 그러면서 운전자 박모(60)씨가 심장마비 등 신체적인 문제로 사고가 났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 이에 따라 경찰은 차량과 박씨의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감식 의뢰했다.

국과수는 17일 조사 결과를 경찰에 통보했다. 국과수는 차량에서 특별한 결함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브레이크 오일 유압 등을 살펴봤지만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택시는 2008년형 차량으로 보험사와 경찰 조사 결과 차량 사고를 낸 적이 없었다.

박씨의 부검을 통해서도 음주운전이나 약물 복용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국과수는 심장질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박씨의 아들은 “아버지는 건강했고 특별히 드시는 약도 없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차량에 장착된 블랙박스 조사도 사고 원인 규명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블랙박스엔 차량 진행 상황이 기록돼 있다. 확인 결과, 택시는 선릉역에서 한티역까지 약 1.7㎞의 직선 구간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횡단보도의 정지 신호도 무시했다. 심장마비로 사고 원인을 추정한다면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선을 침범한 난폭 운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박씨의 유족과 주변 사람들은 “그가 난폭 운전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10년 전부터 택시를 운전하면서 한 번도 사고를 낸 적이 없었다.

국과수의 조사 결과만을 보면 박씨가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강하게 밟아 인도로 돌진했다는 얘기가 된다. 평소 모범적인 운전자였던 박씨가 그토록 난폭 운전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경찰 관계자는 “박씨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려다가 순간적으로 혼동해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았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보험사 관계자는 “박씨 같은 베테랑 운전자가 페달을 잘못 밟은 채 50m를 달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반박했다.

택시는 아파트단지 정문 부근에서 갑자기 인도로 방향을 틀었다. 이 때문에 차량 안에서 박씨와 승객 사이에 몸싸움 등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택시에 탄 승객은 전모(42·여)씨와 김모(35·여)씨였다. 전씨는 역삼동에서 유흥주점을 운영하고 있고 김씨는 그곳 종업원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자살’ 또는 ‘차선 오인’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보험사 관계자는 “15년 동안 교통사고를 조사했지만 원인이 이번처럼 미스터리한 경우는 처음”이라며 “보통 운전자는 사고를 먼저 감지하고 보호 동작을 취해 살아남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은 원인을 말해줄 당사자들이 모두 죽어버렸다”고 말했다. 블랙박스 역시 녹음 기능이 없어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3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교통사고는 결국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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