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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산하 북녘풍수]16.평양의 主山 금수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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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2월16일. 평양의 첫날밤을 돌아보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북녘땅에 첫발을 내디딘 흥분과 긴장감, 베이징 (北京) 을 에돌아 온 피로에 못이겨 정신없이 잠만 자는 것으로 그 밤을 넘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내가 평양답사에 '서둔다' 는 느낌을 줄 정도로 열심이었던 데는 그런 아쉬움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했던 탓도 있을 것 같다.

평양은 북성 (北城).내성 (內城).중성 (中城).외성 (外城) 등 모두 네개의 성으로 구성돼 있다.

북성은 금수산 (錦繡山) 의 최고봉인 최승대 (最勝臺) 를 정점으로 해 을밀대 (乙密臺) 와 모란봉 (牡丹峰).부벽루 (浮碧樓).청류정 (淸流亭) 등을 잇고 있는 아주 좁은 범위의 성이다.

금수산은 최승대와 을밀대.모란봉 연봉을 통칭하는 지명인데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라 한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서남쪽으로 칠성문 (七星門).조선혁명박물관.만수대의사당 등을 거쳐 내려오다가 인민대학습당 자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동강을 만난 뒤 그 상류인 북쪽으로 올라가며 대동문 (大同門) 과 연광정 (練光亭) 을 거쳐 다시 을밀대로 합류하는 구조로 돼 있다.

이곳은 지금도 그 한 가운데에 김일성광장과 정부종합청사를 껴안고 있는 평양의 중핵지 (中核地) 라 할 수 있다.

중성은 만수대의사당 부근에서 서쪽으로 나와 보통문을 거친 뒤 보통강 흐름을 따라 남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평양 중남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창광산 (蒼光山) 과 서기산 (瑞氣山.현재는 해방산) 을 왼쪽으로 끼고 대동강변에 이르는 성이다.

그리고 창광산과 서기산의 남쪽 전체, 즉 대동강과 보통강이 가로 막듯이 싸안고 있는 오늘의 평양시 평천구역이 외성에 해당된다.

이렇듯 성을 네겹이나 쌓으면서까지 평양을 중시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곳이 지리적 요충이기 때문이다.

성호 (星湖) 이익 (李瀷) 의 말을 빌리면 평양이 있는 서관 (西關.관서지방) 은 조선의 3대 왕조 (단군조선.기자조선.고구려) 터로 산물이 풍성하고 주민이 많은 땅의 중심이다.

특히 평양은 관서 유일의 중진 (重鎭) 이며 경승 또한 천하 제일이니 산을 머리에 베고 강으로 띠를 두른 곳 (枕山帶水.명당을 지칭하는 풍수용어) , 둔덕을 짊어지고 물을 끼고 있는 땅 (負岡臨水.역시 명당을 가리키는 말) 이다.

정말 그런가.

평양은 금수산을 주산 (主山) 현무 (玄武) 로 삼는다.

'동국여지승람' 에서는 이 산을 진산 (鎭山) 으로 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여지승람' 전체가 고을의 주된 의지처를 모두 진산이라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고 풍수적으로는 주산 현무가 올바른 표현법이다.

주산이란 마을이나 고을의 모체적 상징성을 띠는 곳으로 그 고장 출신 사람들에게는 고향 혹은 어머니의 대명사와 같은 산이다.

그러니 평양 사람들이 모란봉.을밀대.금수산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운무 자욱한 날씨 속에 단군과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숭령전 (崇靈殿) , 고려 말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숭인전 (崇仁殿) 을 지나 모란봉예술극장 아래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1948년 '남북 연석회의' 장소로 쓰였다는 모란봉예술극장은 다행히 전쟁의 재해를 거의 입지 않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마치 어릴 때 몇번 가 본 적이 있는 서울 명동의 시공관 (전 국립극장) 건물을 보는 느낌인데 규모는 그보다 큰 편이다.

바로 그 뒤가 평양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이다.

칠성문이 북두칠성에서 따온 이름이라 하지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우리 전래의 칠성신앙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칠성문은 을밀대와 만수대를 잇는 산등성이에 있는데 특별히 이론풍수적 원칙, 다시 말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풍수원리를 따른다거나 좌향 역시 정북이니 정동이니 하는 형식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세의 흐름에 내맡겨 건물을 세웠다.

우리 자생풍수 (自生風水) 의 영향을 여기서도 본다.

성곽도 따로 옹성 (甕城) 을 쌓지 않고 성벽 그 자체를 성문 바깥 쪽으로 둥글게 내둘러 쌓아 놓았다.

*** 이 또한 중국성곽 축조의 전형을 따르지 않고 풍토에 적응코자 했던 우리식 성 쌓기의 한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성문 아래에는 아직도 고구려 축성 양식 그대로인 돌담이 있어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로서의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밑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철옹성 (鐵瓮城) 바로 그것인양 웅장하고 위압적이다.

다시 을밀대를 바라보며 산을 오르는데 음산한 날씨에 까마귀까지 울어댄다.

기분을 풀 양으로 내가 "까마귀가 보신에 좋아 남녘에서는 한마리에 30만원까지 받고 팔린 적이 있답니다" 하니 안내하던 리선생이 내 말을 받아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를 해준다.

"까마귀에는 열물 (熱水) 이란 내장기관이 달려 있습니다.

까마귀가 태양의 상징이 된 건 이것 때문인데 사람 몸에도 역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까마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열물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잡으려면 반드시 해뜨기 직전, 그들이 동작에 들어가기 전에 포획해야 합니다.

조선에 세가지 삼 (蔘) 이 있는데 산에서 나는 것은 산삼이고 물에서 나는 것은 해삼, 하늘에서 나는 것이 바로 까마귀인 비삼 (飛蔘) 이란 것입니다.

" 그의 지식에 감동받는 것도 잠깐, 나는 당장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 않아도 멸종 소리까지 나오는 까마귀가 이 소문이 퍼지면 정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것은 아닐까. 칠성문에서 조금 더 산을 오르면 을밀대가 나오고 바로 앞 봉우리에 최승대가 바라보인다.

6세기 중엽에 세워진 을밀대는 그 기능이 평양 내성의 군사 지휘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경승 (景勝) 으로 유명하다.

여기선 김일성경기장과 TV송신탑.개선문과 함께 평양 시가지가 환히 내려다 보인다.

사방 경계가 확 트여 막힌 곳이 없으니 을밀대를 일컬어 사허정 (四虛亭) 이라 한 것이 헛 말이 아님을 알겠다.

뿐인가.

을밀상춘 (乙密常春) 은 평양 팔경의 하나인데 아마도 주변 경관의 짜임새로 따지자면 그 중 으뜸일 것이다.

본래 고구려 내성의 북장대 터에 세워진 누각인데 지금도 아랫부분의 축성은 고구려 양식이 그대로 남아 웅혼한 기백을 엿볼 수 있다.

높이 솟은 돌축대 위에 2익공 바깥도리식의 합각지붕이 날아갈 듯 둥실 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정 건물은 18세기 양식이라 한다.

좌향은 남서향. 역시 어떤 이론풍수적 원칙을 따르기보다 금수산의 지맥기세 (地脈氣勢) 를 자연스럽게 따른 자생 풍수의 흔적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 회는 '대동문과 연광정'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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