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만 vs 37만 … 숫자에 숨겨진 여야 비정규직법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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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올해 7월이면 100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 전환이냐, 대량 해고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지난 2월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정부와 한나라당은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안을 검토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보다 실업자가 되는 것을 막는 게 더 시급하다(임태희 정책위의장)”는 게 이유였다. ‘100만 명 실업대란’이라는 숫자는 여권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당시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2008년 8월 기준)에서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한시적 근로자 중 2년 넘게 근무한 사람이 95만8000명에 달한다는 계산에서 나온 숫자였다.

민주당은 즉각 반발했다. “계약 시점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100만 명이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리는 게 아니다(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는 주장이었다. 민주당은 대신 ‘20만 명 지원론’을 내밀었다. 매월 고용 기간 2년을 넘기는 사람들 중 재계약에 성공하거나 이직하는 규모 등을 제외하면 실제로 실직 위기에 놓인 비정규직 근로자는 연간 20만 명에 달한다는 분석이었다.

100만 명과 20만 명 사이의 간극만큼 여야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추 위원장은 2월과 4월 임시국회 내내 정부가 제출한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환노위에 상정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최근 7월을 보름 앞두고 여야가 입장 차를 좁혀 가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숫자에서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30만 명 정도 낮춘 71만4000명이 실직 위험에 처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통계치 86만8000명에서 고용 기간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55세 이상 고령자 14만5000명과 15시간 미만 단시간 근로자 9000명을 뺐다. 환노위 한나라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8일 민주당에 ‘러브콜’을 보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비정규직법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니만큼 법을 빨리 통과시켜 추경 때 편성한 비정규직 관련 예산 1185억원을 집행하자”고 말이다.

민주당도 37만 명으로 수치를 올렸다. 한나라당의 71만4000명에서 향후 1년간만 따진 수치다. 박병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매달 2년을 넘겨 재계약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2만5000~3만 명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같은 통계(2009년 3월 기준)에서 정부와 한나라당은 ‘기간에 상관없이 2년을 넘기면 해고될 위험에 놓인 사람들’을, 민주당은 ‘앞으로 1년 동안 해고될 위험에 놓인 사람들’을 골랐다. 박 정책위의장은 “사람은 바뀌어도 일자리가 줄어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1년간 수치를 택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15일 여야는 3당 환노위 간사와 한국노총·민주노총 위원장이 참여하는 5인 연석회의를 개최하는 데도 합의했다. 비정규직 해고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경우 여야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박함이 간극을 좁히고 있다.

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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