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정부, 대형 사업에 눈돌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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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경제가 어렵다고들 한다. 문제는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혹은 왜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무성한 논쟁만 있을 뿐 결론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로서는 경제위기 대책을 만들어야 하는지, 경기침체 대책을 세워야 하는지, 혹은 중장기적인 경제발전 전략을 구상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경제정책 수단 중에는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대책이라기보다 당장의 어려움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는 미봉책들이 숨어 있다.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돈을 마구잡이로 뿌리는, 이른바 헬리콥터 머니 식의 발상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경제정책 수단치고는 너무 가벼운 것들이 검토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생각들은 정부 돈을 공돈으로 보던 시대의 유산일 수도 있다. 국민의 공동 부담으로 정부가 돈을 쓸 때는 뚜렷한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한다. 국가부도를 막기 위한 공적자금 지출도 수많은 검토와 평가과정을 거쳤는데, 경제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돈을 뿌리는 수요 확대책을 시행하는 것은 곤란하다.

경기진작을 위한 정부 지출 확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회간접자본(SOC) 함정이다. 국회 예결위에 가보면 많은 의원이 SOC 예산을 늘리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자기 지역구의 도로를 포장하고 다리를 놓아달라는 주장이다. 정치권도 좋아하고 국민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포장할 수 있으니 SOC 지출은 나쁠 것이 없는 경기진작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SOC 투자가 하지 않아도 되는 투자였을 경우 이런 정부 지출은 일시적.국지적 수요 확대 요인으로 작동할 뿐 그 비용은 국민의 상환부담으로 남아 중장기적인 경기침체 요인이 된다. 빈 땅에 구멍을 팠다가 다시 메우는 방식의 유효수요 확대책은 정부 외에 지출을 할 수 있는 경제주체가 없는 대공황 시기에나 사용할 비상수단으로 남겨둬야 한다. 일본이 경기침체를 극복한답시고 성장 잠재력 확충과 무관한 쓸데없는 SOC 투자를 일삼다가 국가 채무만 눈덩이처럼 커지고 경기회복엔 실패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반면 사회통념으로는 가장 비생산적인 지출로 분류되었을 정부지출이 국민경제의 장기적 성장기반을 구축한 사례는 오히려 많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군수산업이 돈을 벌어들이는 계기도 되었지만, 전쟁에 이기기 위해 남이 미처 만들지 못한 무기들을 개발하다 보니 자동차.항공기.기계 등 미국의 주요 제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아폴로계획은 달에서 몇 조각 돌을 주워온 것 외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엄청난 로켓 제조 및 발사기술을 축적해 미국의 성장잠재력을 확충시켰다.

이러한 사례의 공통점은 민간자본이 감당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위험한 프로젝트를 정부가 수행함으로써 민간부문의 성장잠재력이 한 단계 확충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SOC 투자도 민간업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방식의 토목 및 건축기술 개발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정부 돈이 헛되이 쓰이지 않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새 수도 건설의 경우에도 무조건 예산을 아껴 추진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전혀 새로운 개념의 도시건설의 계기로 활용한다면 들어간 돈의 몇 배에 해당하는 생산성 향상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 수도 건설을 한국 건설업계에 신도시 하나 정도의 일감을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지금 한국 경제는 민간부문이 스스로 위험을 부담하는 대형 투자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망해도 잃을 것이 없는 단계를 벗어난 경제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신사는 채권 투자를 좋아한다는 증권가 속담처럼 돈 번 사람은 위험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부라도 나서서 돈을 어디에다 쓰면 한국 경제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볼 때가 아닐까.

서근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