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제3장 함부로 쏜 화살

"이봐. 할 말이 있거든 변죽만 울릴 것 없이 속시원하게 털어 놓는 게 몸에도 좋아. 그러면 나도 툭 털어놓고 서로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주지. 왜 남의 뒤통수만 치려드나?" 그러나 승희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궁심을 가지고 에둘러치는 말이 아니라고 되받았다.

몹시 난감한 변씨의 심사를 읽고 나선 뼈있는 한마디까지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네요. 처음 한선생을 만나게 주선한 것은 변선생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통감자하고 동거하도록 주선한 것도 변선생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지요. 따지고 보면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조정한 것은 한 가지도 없었어요. 심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진로를 이래저래 휘둘러온 사람은 놀랍게도 남들은 단골 관계로만 알고 있는 변선생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번의 일만은 내 작정대로 할 수 있도록 한 번 만 거들어주시는 거예요. 아셨죠?" "듣고 보니 언중유골이군. 그러나 그런 일들을 모두 승희 눈치를 보아가면서 주선했던 것이지, 승희가 한사코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춘향으로 얽어매었나?" "물론 아니예요. 하지만 주문진이 내겐 객지란 건 알고 계시죠? 낯설고 물설은 객지에 떨어져서 인생 선배인 변선생의 말씀을 달보고 짖는 개소리로만 알았어야 옳았게요?" 승희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훔쳐보는 애틋한 여자의 눈물이었다.

흡사 자기와의 사이에 벌어진 애정결핍을 벌충하기 위해 흘리고 있는 눈물로 착각한 변씨는 제멋대로 동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승희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한철규나 박봉환과의 사이에 자신이 개입했던 것은 적어도 승희 앞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승희가 갑자기 짜낸 눈물은 효험이 없지 않았다.

질끔했던 변씨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행중 사람들을 설득시킨다 하더라도 어렵긴 마찬가지야. 어디서 굴러온 것인지도 모를 뜨내기에게 가게를 통째로 맡기고 외장꾼으로 나선다고 하면 봉환이가 숭어뜀을 하면서 소동을 피울게야. 미친 개 날뛰 듯 할텐데 그건 누가 말리지?"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변선생도 알고 있겠죠? 통감자가 양양 다녀온 지가 벌써 언제예요. 어디 그뿐인가요. 당일발이 어선까지 타고왔으면서도 집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잖아요? 그 사람에겐 명색이 동거하고 있다는 여자는 물론이고,가게 일 따위는 관심 밖이란 것이 증거로 드러나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행중들을 따라 외장꾼으로 나선다 할지라도 소 닭보듯 할 게 분명해요. "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징조만 보면, 승희 말이 그른 게 없어. 그러나 출타했다가도 일이 꼬이게 되면, 하루 이틀은 집에 들르지 못할 경우는 허다한 일이야. 승희가 탈없이 가게를 지키고 있겠거니 해서 안심하고 그러는 게야. 어디 봉환이 뿐이가.

세상 남정네들이란 게 모두가 그렇게 미련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승희는 알고 있지 않나. " "그것도 성품 나름이지요. 우리 통감자 성질 급한 거 변선생은 모르세요? 그 사람이 난생 처음 뱃일을 나갔는데, 팔만 뻗어도 손끝이 닿을 가게에 와서 내 당일발이 타러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을 사람입니까? 자꾸 빠져나갈 구멍만 찾으시면, 나도 중대한 결단 내릴 거예요." "무슨 결단?" "봉환씨한테 옛날에 진부령에서 벌어졌던 일, 고백해버릴래요. 그렇게 되면 한선생이나 변선생 입장이 말이 아니겠지요? 하얗게 질린 채로 추궁당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내한테 그만한 용기나 배포가 없을 것 같죠? 아녜요.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한 배포쯤이야 못 낼 것 없죠. 어떡하실래요? 내 요청, 군소리없이 접수해 주실 거죠?"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