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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칼럼]'서울대 고시학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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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대 구내 한 건물 앞, 오후부터 학생들의 줄서기가 시작된다. 책가방으로 줄을 대신하고 벤치에 누워 잠을 자는 학생도 있고 몇몇이 모여선 빈 우유팩으로 제기차기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한다.

언뜻 보면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구나,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다는 낙관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인기있는 고시과목 수강신청을 위해 전날 오후부터 전산원 앞에 줄서기를 하며 밤샘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야말로 해외토픽에 오를 기상천외의 줄서기가 아닌가.

실제로 다음날 아침 7시부터 시작된 수강신청 접수 결과는 '민법총칙' 과 '물권법' 등 이른바 고시전략과목에 몰렸다. 올해만의 기현상이 아니다.

해가 거듭되면서 숫자가 늘어나 올해엔 1천여명이 전날 오후4시부터 밤샘 줄서기에 나섰다. 서울대앞 고시촌에는 줄잡아 1만7천여명이 고시준비를 하고 있다.

그중 40%인 6천8백여명이 서울대생이고 그중 절반인 3천여명이 재학생이며 또 그중 30%가 비법대 학생이란 게 하숙집 주인들의 추산이다. 서울대 전체 2만명 학생중 예체능.이공계 학생을 제외하면 30% 가까운 재학생들이 고시준비를 위해 대학을 다닌다는 계산이 나온다.

세계에 이런 대학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물론 우수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유능한 행정관료가 되기 위해 고시공부를 한다는 게 매도받을 일은 결코 아니다.

출세지상주의 풍토가 대학가에 만연하면서 연구와 교육이라는 대학 본래의 기능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60년대 서울대의 동숭동 시절에도 강의실에 한번 나오지 않은 채 도서관에서 고시준비를 했던 낯선 동급생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땐 그 숫자가 극히 적었다. 이처럼 확산되는 것은 복수전공을 허용하는 학부제가 도입되면서 불확실한 학과공부보다는 확실한 고시공부를 하자는 쪽으로 열기가 모인 탓이다.

36학점만 이수하면 전공학위를 준다. 교양필수도 없고 전공필수과목도 없다.

어려운 과목은 피하고 고시에 필요한 과목에 집중한다. 볼링.영화감상 같은 취미과목에 학생들이 몰리고 역사.철학 강의실은 텅텅 빈다.

대학의 고시학원화는 기초학문의 황폐화와 국가고시를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문제와 연관시켜 동시에 풀어가야 할 중대사안이다. 이미 2년전 서울대 법대 최대권 (崔大權) 교수는 '서울대 전체가 거대한 고시학원화 되고 있다' 는 사실을 폭로하듯 지적한 바가 있다.

법대 고시과목 수강생의 절반 이상에 인문대.사회대에 공대생까지 끼여 있으니 타대학 교수들이 법대가 교육을 망친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한다는 것이다.

법대생이라한들 폭넓은 법학교육을 받을 시간이 있는가. 몇몇 강의만 들은 채 고시방에 틀어박혀 암기식.요점식 고시과목만 파고드니 제대로 된 교양과 전문성 있는 법학교육을 받을 겨를이 없다.

최근 법대 한인섭 (韓寅燮) 교수는 의정부지원 비리 같은 법조비리의 책임은 법조인 60%이상을 공급해온 서울대 법대에 책임있다는 고통어린 고백을 한 학술지에서 토로하고 있다. 대학가 고시열풍은 제대로 된 법조인을 공급하지도 못하면서 대학 본연의 학문풍토만 망가뜨린다는 결론에 이른다. 서울대학교가 살고 전문성 있는 법조인을 공급하면서 정상적인 국가고시제도를 운영하자면 두가지 개혁을 동시에 해야 한다. 먼저 지난 정부의 교육개혁에서 실패한 법조인 양성체제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

다양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법조인 양성을 현행 교육체제나 시험방식으로는 수용할 수 없다. 적어도 대학졸업자에게 응시자격을 주든지 미국식 로스쿨 형태의 법과대학원으로 가든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시험방식도 현행 요점식 암기위주 방식을 지양하고 문제를 생각하고 분석하며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례별 응용문제를 출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시제도 개선과 아울러 서울대학교의 기본위상도 바꿔야 한다.

원래 학부제 도입은 연구중심의 대학원 교육을 전제로 한 것이다. 대학원에선 세부적 전공을 배우고 대학에선 폭넓은 교양과 인접학문과의 교류를 체험하기 위한 전인적 (全人的) 교육장치다.

이미 서울대학교는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나간다는 방침을 정한 지 오래다. 타대학과 경쟁하듯 특차모집에 나서서 우수한 인재를 고시준비생으로 내몰지 말고 정말 제대로 된 연구와 다양한 교육을 하고 있다는 대학다운 대학의 전형을 보여야 한다.

고시의 경쟁력 아닌 학문의 경쟁력을 키우는 대학이 서울대학이어야 한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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