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증권 투자 15개월간 800억 달러 감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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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부동산과 달리 해외 증권 투자는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해외 펀드에 새로 돈을 맡기려는 투자자는 눈에 띄게 줄어든 대신 맡긴 돈을 찾아가려는 투자자는 줄을 잇는다.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에 따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3월 말을 기준으로 해외 증권 투자 잔액은 697억 달러로 집계됐다. 해외 증권 투자가 가장 활발했던 2007년 말(1586억 달러)에 비해 반 토막 이하로 쪼그라든 것이다. 올 1분기만 따져도 57억 달러가 줄었다. 이 중 29억 달러는 해외 주가 하락으로 주식의 평가액이 감소한 것이고, 28억 달러는 기왕에 투자한 돈을 회수한 것이다.

해외 증권 투자는 2005년 말 521억 달러에 그쳤으나 2006~2007년의 2년간 세 배 이상불어났다. 국내 은행·증권사들이 해외 펀드 판매에 열을 올린 이유도 있지만 정부도 외환시장 안정을 목적으로 적극 거들었다. 당시 국내 외환시장은 달러가 넘쳐나 원화 값이 가파른 상승세(환율은 하락세)를 보였다.

정부는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랏돈으로 해외 투자에 나섰다. 2005년 해외 투자 전담 기구로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한 것이다. KIC는 2006년 10억 달러를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220억 달러까지 투자액을 늘렸다. 이 중 170억 달러는 한은이, 50억 달러는 정부가 돈을 댔다. 한은의 돈은 ‘나라의 비상금’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보유액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KIC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다.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전략적 지분 투자’란 명목으로 인수한 미국의 투자은행 메릴린치 주식 20억 달러어치다. 여기서만 KIC는 12일 현재 약 10억 달러의 평가 손실을 보고 있다. 다만 KIC의 손해는 확정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가 등락에 따라 달라진다.

KIC는 처음 메릴린치에 투자를 결정한 지난해 1월 연 9%의 배당금을 받는 우선주를 사들였다. 2010년 10월이 되면 주당 52.4~61.3달러에 보통주로 전환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메릴린치는 기존 조건보다 싼값(주당 27.27달러)에 우선주를 보통주로 바꿔주겠다고 제안했고, KIC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경제위기로 큰 타격을 받은 메릴린치는 지난해 말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흡수 합병됐다. 이 과정에서 KIC의 지분도 메릴린치가 아닌 BOA 주식으로 바뀌었다.

현재 KIC는 BOA의 보통주 6209만3045주를 갖고 있다. 주당 인수가격은 29.96달러지만 12일 뉴욕 증시에서 BOA 주가는 13.72달러에 그쳤다. BOA 주가는 한때 미국 정부의 공적 자금 투입과 감자설로 3달러 선까지 떨어졌으나 1분기 실적이 월가의 예상을 크게 웃돌자 10달러대로 반등했다. 덕분에 KIC도 평가손을 크게 줄였다.

이 밖에 KIC는 ‘포트폴리오 투자’란 이름으로 해외 주식·채권에 200억 달러를 분산 투자했다. 1월 말 국회에 보고할 당시 평가손실은 27억4000만 달러(수익률 -13.7%)에 달했으나 이후 주가 반등과 채권값 상승으로 손실을 상당히 만회했다. 하나은행도 KIC의 뒤를 이어 메릴린치에 투자했다가 울상을 짓고 있다. 하나은행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메릴린치 주식 투자로 678억원의 평가 손실을 냈으며, 올 1분기에는 BOA 주식으로 전환해 147억원의 추가 손실을 기록했다. 3월 말 현재 하나은행이 보유한 BOA 주식은 142만 주에 달한다.

익명을 요구한 KIC 관계자는 “메릴린치의 지분 인수는 단기 시세 차익을 노린 것이 아니라 5년 이상을 내다본 장기 투자”라며 “투자 수익률 외에 BOA의 주주로서 전략적 관계를 맺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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