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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제3장 함부로 쏜 화살

승희가 대낮에 부둣가에서 남의 눈치 따위는 아랑곳 않고 변씨의 팔짱을 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봉환과 동거하기 전 평소 승희를 탐했던 변씨는 여러 번 그녀에게 방파제라도 거닐자고 유혹했었으나 승희는 그때마다 메기 잔등으로 가물치 넘어가듯 날렵하게 빠져나가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도대체 어인 까닭일까. 겨드랑이에 착 달라붙은 승희의 어깨짬에서 무슨 화장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콧등이 시큰한 수박 냄새조차 풍겼다.

그들은 남녀 어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어망을 꿰매고 있는 선착장 동쪽 모퉁이를 돌아서 방파제 초입으로 들어섰다.

안면있는 축들이 팔짱 낀 그들의 해괴한 모습을 발견하고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어부들은 전통적으로 여색을 삼가왔었다.

어장을 가졌으나 배로 사업을 하는 선주들은 개를 기르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음력 열엿샛날은 귀신날이라 해서 바다의 고기가 넘쳐 뱃전으로 기어오를 지경이라 해도 그물을 치지 않았다.

그렇게 까다로운 금기중에도 가장 삼엄하게 가려온 것은 여색이었다. 그래서 출항을 앞둔 어부들은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고, 바다로 나간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는 아내의 당부도 해롭게 여겼다.

배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여자를 태우지 않았고, 여자가 어망을 타넘는 일은 그 정조를 더럽히는 일만큼이나 불길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요사이 이르러 여자가 없으면, 터진 어망을 꿰매는 일조차 수습을 못할 만큼 세태는 변해버렸다.

그래서 뱃사람이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걸 봐도 예사스런 것으로 여겼고, 승희처럼 여자가 어망을 타넘는 일쯤은 고등어 자반 뒤집는 일처럼 다반사가 된 것이었다. 방파제는 젊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문진 어물난전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활기차기로 소문난 지 오래여서 낮이면, 외지에서 찾아온 관광버스가 아직도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 관광객들 중에는, 애써 훔쳐보지 않아도 배꼽이 훤하게 드러난 것은 물론이고, 미주알이 들여다 보일까 조마조마한 짧은 치마를 옷이라고 꿰입은 앳된 여자들이 많았다.

변씨가 혀를 끌끌 차면서 시선을 먼데로 돌리고 말았다. 배꼽이란 원래는 어머니와 아이가 하나임을 증명해주었던 신성한 샘터와 같은 것이었다.

생명의 자양분을 공급해주던 탯줄의 흔적인 배꼽은 인체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어 신성시되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혁대의 목적과 효용성도 본래 배꼽을 막고 보호하기 위한 방편인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도 요사이 자발없는 젊은 계집들은 유행이라면 배꼽 드러내기를 예사로 안다고 변씨는 투덜거렸다.배꼽이란 힘줄과 맥이 모이는 곳이고 오장육부를 거느리는 관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꼽이 깊고 넓으면 복이 있고 지혜롭다. 얕고 좁으면 어리석고 천한 성품임에 틀림없다.

들어가서 아래로 향해 있으면 지식이 있고, 튀어나와 위로 향해 있으면 지혜가 없다. 아래 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가난이 떠날 날이 없고, 위쪽으로 치우쳤으면 일생에 한 번은 재물이 쌓인다.

그리고 삐딱하면서 더러우면 성품이 선하지 못하다.

깊숙하게 간직되어 있으면 십중팔구 복록이 따르고, 튀어나와 있으면 필경 천박하다. 그런 비밀스런 관상학적인 면모까지 모두 배꼽에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까발리고 다닌다고 변씨는 입에 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는 변씨가 난처한 처지를 잠시나마 모면하려고 엉뚱한 말로 승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시치미 떼고 딴소리 하지 말고 내 말 들어보세요. 물론 놀랐겠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변선생은 꼼짝없이 내 편이 되어줘야 해요. 내가 왜 이런 말 하고 있는지 대강은 눈치 채고 있겠죠? 묵호댁이 혹시 잔돈푼 정도의 계산은 속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욕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식당을 통째로 들어먹지는 못할 거예요. 그 식당을 떠메고 간들 어디로 가겠어요. 가봤자 묵호겠지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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