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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현식의 시공짚기]서구식 '광장'을 넘어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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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는 특징있고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다. 1천년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온 이 도시들을 여행하노라면 마치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 현실에 나타난 듯한 환상에 빠진다.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의 보물창고 피렌체를 비롯하여 현대 마천루를 연상시키는 탑의 도시 산 지미나노, 벼랑과 동굴의 도시 피틸리아노, 젖빛 유황 온천수가 넓은 계곡을 달리는 사루니아 등등.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광장을 품고 있는 시에나가 있다. 이곳 시에나에서 단순하게 디자인된 석조건물들의 틈으로 나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갑자기 밝게 터지는 캄포광장 (Plazza del Campo) 을 만나게 된다.

1천여 년을 이어온 이 도시의 옥외거실이다. 약 1백20m×90m의 넓은 부채꼴 모양인 이 광장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5층 내외의 건물들과 아름다운 중세 궁전 (Palazzo Pubblico) 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곳을 알리듯 탑 (Torre del Mangla) 이 등대처럼 꽂혀 있다.

특히 동남쪽으로 완만히 경사진 바닥판 때문인지 그 어느 광장이 가지지 못한 역동적 기운이 넘친다. 황소 싸움과 안장 없이 타는 경마 등 다이내믹한 팔리오 축제가 1년에 두번씩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의 여의도 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더더구나 서울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광장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 김수근팀 (김수근+윤승중 등) 이 입체적 도시로 제안했던 여의도 도시설계안 (1967~69년)에는 이런 광장이 있지도 않았다.

그들이 제안한 60년대식 유토피아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군사 퍼레이드에 적합하도록 슬그머니 평면화되어 버렸다. 그것은 사회주의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각광받았던 대형광장과 흡사하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북경 천안문 광장 그리고 히틀러 시대 알버트 슈페어가 그려냈던 파시스트 광장들이 그러했다.

군사적.사상적 힘을 과시하려는 퍼레이드를 위한 그냥 넓기만한 곳일 따름이다. 그런 탓인지 지금까지 여의도 광장은 비대해진 종교들의 힘겨루기 같던 대규모 종교집회, 바람몰이를 목표로 한 3김 시대의 정치유세장 등 비정상적인 대규모 집회장으로 긴히 쓰여왔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의도 광장 녹지화가 최상의 대안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지난 어두운 시대 정권들의 잔재는 어떻게든 치유되어 시민을 위한, 시민생활의 장 (場) 인 광장다운 광장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시에나의 캄포광장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무작정 베껴놓을 수는 없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체적으로 동양권의 나라들에서는 서구와는 다른 정치제도와 산업구조 때문에 전통적으로 광장이 발달하지 않았다. 서구를 전범으로 한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억지로 베껴온 서구식 광장들이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성공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같은 딜레마에서 전통적으로 우리의 도시와 건축을 특징지어온 '마당' 은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궁궐.사찰.서원, 그리고 주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축들이 각기 성격에 따라 만들어낸 적절한 크기의 마당들은 그 독특한 기능과 오묘한 공간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지역에서도 찾기 힘든 우리 고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신현식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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