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사태 진세근특파원 7신]약탈·방화…자카르타는 불타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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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4일 저녁 어둠이 짙어지면서 자카르타는 더이상 민주화시위라고는 부를 수 없는 폭동과 방화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도심지 증권거래소 부근 등 곳곳에서 총성이 울려퍼졌고 검은 연기가 그칠 줄 모르고 피어올랐다.

폭도들은 수십~수백명씩 떼지어 몰려 다니며 불이 켜져 있는 곳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약탈하고 불질렀다.

당국은 약탈자에 대해 즉각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군인들이 시위대에 손을 흔드는 모습도 엿보였다.

한 소식통은 "나이 어린 고교생은 물론 군인들중 일부도 시위대에 동조 또는 합세한 것으로 안다" 고 전했다.

자카르타시의 수카르노 - 하타 국제공항은 이날 낮12시를 기해 잠정폐쇄됐다.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남편.아이들에게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공항을 찾았던 화교 수안치 (38.여) 는 오후 늦게 파김치가 돼 호텔로 돌아왔다.

그녀는 "공항청사 안에서 고위관리들과 부유층.화교들 수백명이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며 "비행기표가 있어도 탈출은 불가능하다" 고 발을 동동 굴렀다.

중심가인 수구로토가에 있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송동규 (宋東奎) 부관장은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니 수백명의 군중이 구호를 외치며 약탈에 여념이 없었다" 며 "개중에는 어린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고 혀를 찼다.

불탄 상가 곳곳에서는 시커멓게 탄 시체도 여러 구 발견됐다.

군 특수부대가 장갑차들을 동원해 시내순찰에 나섰으나 폭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군당국은 이날 공수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원 7백명을 자카르타로 긴급투입했다고 관계자들이 밝혔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시내에서는 경찰로부터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국방색 군용트럭들에 올라탄 폭도들이 도로를 누비고 있었다.

유료도로의 톨게이트는 가로막대가 부러져 있었고 근무자는 아무도 없었다.

유력영자지 자카르타 포스트의 빈센트 링가 (48) 편집국장대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어제 12명, 오늘 2명을 합해서 이틀 사이에 또다시 14명이나 숨졌다" 며 참담해 했다.

그는 "이들은 시위대라기보다는 약탈하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자들이며 방화로 숨진 가게주인도 여럿 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 추정했다.

시내 호텔은 폭도를 피해 밀려든 화교들로 초만원이었다.

이들은 "시내 곳곳에 형성된 차이나타운은 일찌감치 폭도들의 집중표적이 돼 초토화됐다" 며 "다 포기하고 목숨만 건져 도망나왔다" 고 말했다.

이들은 또 "폭도들이 더이상 털 것이 없자 고급호텔들을 습격하기 위해 떼지어 몰려온다는 소문이 있다" 며 극도로 불안스러워 했다.

주요 호텔들은 자체경비원에다 따로 '어깨' 들을 고용해 투숙객 보호에 나섰다.

경찰에는 더이상 기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시위에 동조적이었다는 투숙객 아지 (26.여) 는 "밖에서 몰려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시위대가 아니다.

폭도다.

그들에게 총을 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고 격분해 말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귀국에 발맞추듯 다수 민간인과 3명의 군인 사망자까지 낼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인도네시아의 앞길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웠다.

자카르타=진세근 특파원 〈sk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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