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돌(石)의 자존심을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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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제10보 (138~153)]
黑.안조영 8단 白.이세돌 9단

약육강식의 전쟁터인 바둑판에서 '체면'을 찾는다는 것은 좀 우스워보인다. 그러나 고수일수록 자신이 둔 '돌의 체면'을 매우 중시한다.

그들은 한번 둔 수의 얼굴을 살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체면이란 그저 허례허식이 아니라 운영의 품격이나 전략의 일관성과 연관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잠시 필름을 앞으로 돌려보자. 이세돌9단이 갈등의 기로에서 백△를 선택한 것은 미리 놓인 백△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 두수가 합작하면 A의 패로 절단을 노릴 수 있다. 백△가 없다면 이 판의 스토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백△는 그저 목숨을 건진 구차한 한 수로 운명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흑의 안조영은 우변에서 노림수를 발동시켰고 백은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다. 138로 끊고 140 모는 수는 다 두기 싫은 악수지만 우변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하다. 이리하여 143까지 하변에서 중앙에 이르는 흑의 진영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됐다. 서둘러 더이상의 확대를 봉쇄하긴 했지만 그래도 151까지 흑은 이곳에 50집이 넘는 큰집을 확보했다. 이제 형세는 너무도 미세해졌다.

이전에 백△ 대신 '참고도'백1처럼 중앙을 삭감해 나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실전보다는 이 코스가 백엔 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세돌은 자신이 둔 돌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난코스를 선택했다. 많은 것을 잃은 이세돌에게 남은 노림은 A의 패. 비유하자면 현찰을 내주고 부도 가능성이 큰 어음을 손에 쥔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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