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경제 위기보다 무서운 무기력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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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경제위기냐 아니냐 하고 논의할 때는 이미 지난 것 같다. 한 달여 사이에 한국경제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그런 조짐이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발표된 통계가 그걸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수출만 괜찮을 뿐 소비.투자가 영 부진하다. 5% 중반의 올해 성장 전망이 일제히 하향 조정되고 있다. 정부당국자도 한국경제가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비유했다. 그러나 일본과 같은 장기 침체로까진 가지 않을 것이라며 한가닥 희망은 남겨 두었다.

*** 질책과 추궁만 있는 풍토 바꿔야

어찌 보면 무기력증이 위기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다. 위기는 열병같이 한번 호되게 앓으면 되지만 무기력증은 은근히 길게 사람을 골탕 먹이기 때문이다. IMF 사태와 같은 위기는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분발케 하는 위장된 축복이 될 수도 있다. 평상시 같으면 불가능했던 여러 시스템 개혁이 IMF 위기 때 많이 이루어졌다. 무기력증은 당장 고통은 없으나 의욕과 기력이 점차 떨어져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일본의 10년 침체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초기에 시행착오를 많이 했으나 기업과 은행을 중심으로 느리지만 착실한 구조조정을 하여 최근 들어 눈에 띄게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

지금 한국경제가 어렵다 해도 수출이 잘 되고 있고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또 통계적으론 실업도 크게 심각하지 않다. 내수와 투자부진이 다 이유가 있다.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충분한 것이다. 차라리 위기라면 처방이 간단할지 모른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호소할 것은 호소하고 밀어붙일 것은 밀어붙이면 된다. 위기를 절박하게 느끼게 되면 참고 분발하는 분위기도 생길 것이다. 또 엉뚱한 욕심을 안내고 분수를 지키는 마음도 가질 것이다. 지금은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모두들 여유있게 투쟁하고 요구도 많은 것이다.

무기력증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무기력증은 오랜 세월에 걸쳐 생긴 병이어서 뚜렷한 증세도 특효약도 없다. 역시 오랜 세월을 두고 조심스러운 섭생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칭찬이나 이해보다 비판과 채찍이 횡행하는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경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여 그걸 부추겨 주기보다 집적대고 질책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살벌한 풍토에선 새 일을 벌이거나 투자가 일어날 수 없다. 큰 일을 하려면 문제는 따르게 마련인데 종합평가보다 실수에 대한 추궁이 더 매섭다. 경제를 귀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쉽다.

둘째는 386세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경제를 좀 이해하게 해야 한다. 경제라는 것은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세상이치에 대한 합리적 이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할 수 없다는 것,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주국방엔 무거운 방위비 부담이 따르고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며 그냥 높은 임금을 받으면 일자리가 적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또 투자와 관련해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이기는 어렵다는 것도 짐작할 것이다. IMF 사태 때 경제공부 많이 했는데 좀 형편이 나아지니 많이들 잊은 것 같다.

*** 386세대 경제공부 더 열심히

셋째는 책임있는 주치의가 있어야 한다. 무기력증을 치료하려면 여러 전문의의 협조를 받아야 하지만 치료방법을 조정하고 최선의 방법을 결단할 주치의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 경제적 질병은 대개 복합증상을 띠고 있어 치료의 대소완급이 아주 중요하다. 각 전문의들이 저마다 중요하다고 치료를 달리하면 큰 탈이 나기 쉽다. 지금은 경제부총리가 성장이 중요하고 시장을 중시하자고 강조하면, 균형이 중요하며 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같이 나오고 있다.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경제부총리가 하든 더 심각해지면 대통령이 직접 하든 치료는 일관성있게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장단에 춤출지 몰라 무기력증 치료는 더 오래 갈지 모른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