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경제 이렇게 풀자]3.우선순위 따라 속결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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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결단을 빨리 내려야한다. 털건 털어야 새출발도 가능하며 머뭇거리면 더 손해일 뿐이다. " 부실기업정리에 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쓰러질 기업과 살릴 기업에 관한 교통정리를 과감하고 신속하게 하는 것이 우리 경제의 살 길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 당장의 타격이 크더라도 장기적인 경제체질을 강화하려면 부실기업은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금리는 96년의 연12.4%보다 최소 10%이상 높다. 한국 기업들은 국내 총부채 3천억달러에 대해 연간 3백억달러 이상의 추가 금융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이런 엄청난 손실은 한국 기업들의 대규모 도산과 수백만명의 실업자 발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는 한국전쟁에 비견되는 경제적 재난을 의미한다.

기업들 스스로도 이미 부채 해결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회생, 나아가 경제회생을 기대할 수 없다. 부실기업 처리가 늦어지면 외국인들이 한국의 경제개혁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런 조짐들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대외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부실기업 정리는 더 늦출 수 없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자 = 부실기업 중에서도 우선순위가 있다. 예컨대 기아.한보의 향방을 정해야 국내 자동차업계가 향후 전략을 세울 수 있고 그래야 부품업체들도 계획을 세운다.

한보.기아문제를 계속 끌어온 것을 외국에선 정말 이해 못한다. 시장원리에 맡기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면 외국투자자들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

아무리 큰 회사라도 부도가 나 지불능력이 없어지고, 스스로 회생할 능력이 없으면 빨리 정리돼야 한다. 그래야 관련된 문제들이 노출돼 빠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한보.기아 등 사태가 터졌을때 결단력이 있는 정책이 나왔으면 지금처럼 한국상황이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물론 협조융자기업들을 포함한 향후 부실이 예상되는 기업들도 정리 여부를 조속히 정해야한다.그러나 이는 정확한 범위지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량기업까지 휩쓸려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정부가 재벌을 통째로 손질하려 해서는 안되고 부실화된 기업에만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법정관리나 화의, 협조융자를 신청한 기업들만을 대상으로 생사여부를 판정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대상을 넓힐수록 경제엔 주름이 간다.

◇은행이 판단해야 한다 = 은행이 거래기업 사정은 제일 잘 안다. 과거엔 정치권에 호의적인 기업이 큰 혜택을 받았었다. 정치논리가 개입해선 절대 안된다. 은행은 해당 기업을 쓰러뜨리는 것과 안고 가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자기 은행에, 나아가선 나라경제에 득이 될지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회계법인 등 외부전문가를 보강해야 하며 필요하면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등의 전문가 도움을 받는다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사실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리는 채권자들의 협조를 구하고, 정리대상 기업의 반발과 후유증을 최소화하면서 이를 집행하는 것은 고도로 정밀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대상기업의 덩치나 과거실적보다는 앞으로의 회생가능성이 생사결정의 잣대가 돼야 한다.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빚을 못 갚을 기업은 망하게 하는 시장원리에 충실하면 된다.

◇부실의 1차 책임은 해당기업과 부실대출 해준 은행에 있다 = 은행과 기업간의 거래이므로 우선 책임은 당연히 당사자들에게 있다. 청산을 피하려면 최대한 매각해야한다. 이를 위해 적대적이건 우호적이건 상관없이 외국의 인수.합병에 부정적인 국민감정은 가능한 빨리 완화돼야한다.

오너에게 무한 책임을 지울 수는 없고 일반 주주나 종업원에게 배상시켜도 안된다. 그러나 이들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부실기업주는 물러나야 한다. 결국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으면 안될 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도 재정지원은 국회동의를 반드시 받아야하는 등 최후 수단으로만 써야 한다.

◇부작용 최소화에도 소홀하면 안된다 = 부실 정리때 연쇄도산.대량실업 등 부작용이 어느정도 불가피할 것이다. 정부는 이 부문에 대한 국민을 설득하고 보완책도 세워야한다. 강력한 실업대책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등에서다.

중소기업은 특히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별도 지원해야 한다. 또 중앙은행 차원에서 시중 자금경색을 막기 위한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살릴 기업은 확실히 살려야한다.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 또 대출연장 등을 통해 자립기반을 마련해줘야 한다. 무엇보다 부실정리과정에서 우량기업까지 휩쓸려 도태되는 것은 막아야한다. '살릴 곳은 살린다' 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야하는 것이다.

박영수·유권하·주정완 기자

〈ys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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