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음료수 병이 만드는 기부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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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를 ‘특별한 때, 특별히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부는 일상 생활에서 자연스럽고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이 작품이 나왔습니다.”

한국 대학생이 ‘iF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상’에서 ‘새로운 기부문화시스템((1/2 PROJECT)’이란 출품작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서울과학고 출신인 KAIST 산업디자인과 4학년 김성준(25)씨.

iF는 미국 국제디자인전(IDEA), 레드닷(Red Dot)과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으로 꼽힌다. 김씨의 수상 작품은 절반만 디자인된 음료수 병이다. 즉 세워진 병을 수직으로 자른 모양으로 반쪽은 둥글지만 다른 반쪽은 평평하다. 소비자가 절반만 들어 있는 음료수를 제 값을 주고 사고 절반의 돈을 타인에게 기부하는 시스템이다. 이 작품에는 삼성 디자인 멤버십의 일원인 이화여대 출신 박지원씨도 함께 했다.

최근 이 디자인은 IDEA에도 좋은 평가를 받아 은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또 지난 3월 독일 ‘iF 국제디자인상’에서 ‘휴대용 인명 구조 장비(Rescue Stick)’와 ‘재활의료기구(Recovery Arm Sling)’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휴대용 인명 구조 장비’도 IDEA에서 은상을 받았다. 그는 세 개의 작품으로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중 두 곳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교수님들께서 상복이 있다고 하세요. 감사한 말씀이죠. 제가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운도 좋고 상복도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기부문화시스템(1/2 PROJECT)’은 어떤 작품인가.

=연말 때만 하는 기존의 기부 문화에서 벗어난 디자인이라고 보면 된다. 소비자가 같은 가격으로 절반이 들어있는 음료를 구매하면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음료의 금전적 가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인에게 간다. 반 쪽짜리 초콜릿, 반 쪽짜리 쿠키처럼 다양한 식음료에 확장ㆍ적용할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나.

=지난 연말에 TV에서 불쌍한 이웃의 이야기를 보고 전화 한 통으로 일정액을 기부했다. 길을 지나다 구세군함을 발견하면 돈을 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끔 일어나는 이벤트’에 불과했다. 기부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춰 ‘생활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지구 어느 한 편에선 물 한 모금 마시기 힘든 상황인데 다른 한 편에선 마음껏 편하게 음료를 사서 마신다. 이 점이 프로젝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현실화가 가능할까.

=이 제품을 음료 회사나 비영리단체 등에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이것은 단순히 절반을 잘라놓은 음료수 병이 아니다. 구매자가 어떤 감성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지, 기부의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고민, 또 고민 중이다.

-디자인도 소통이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외형의 미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할 편견이다. 경험이 디자인을 만든다. 흔히 생각하는 산업적 미(美)의 기준도 결국 아름다운 제품을 얼마나 폼나게 사용하는지 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1/2 PROJECT’는 기부를 하면서 타인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연장선상으로 삶에 대한 크고 작은 감성을 전달하는 것도 디자인이 될 수 있다.

-영감은 어디서 얻나.

=내가 좋아하는 ‘관심거리’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공항과 연결되는 지하철의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짐을 끌고 다닌다. 하지만 출입구의 통로가 다른 지하철 역과 비슷하다. 이를 경험적 디자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해답이 나와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유학을 갈 생각이다. 좋은 학교, 높은 학위보다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생활해야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 같다. 외국 친구들을 만나보면 한국인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없고 한국처럼 빠른 기술 발전을 이룬 곳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디자인면에서는 선진국이라는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가능한 낯선 경험을 많이 해볼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하는 다양한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iF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상 시상식은 오는 8월 독일 뮌헨 BMW 본사에서, IDEA 시상식은 오는 9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각각 열린다. “‘1/2 PROJECT’의 궁극적인 목적은 음료 업체들과 계약을 맺어 이를 실천에 옮겨 기부 문화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공모전에 작품을 낸 이유는 수상을 해야 여러 업체와의 대화가 좀더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좀 더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시상식 의상을 고민해봐야겠죠.”

이지은 기자

▶휴대용 인명 구조 장비(Rescue Stick)

‘휴대용 인명 구조 장비’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신속한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기구다. 이 제품을 바다에 빠진 사람에게 던지면 물에 녹는 실에 의해 압축돼 있던 스프링이 팽창한다. 이후 제품 내 압축돼 있던 이산화탄소가 분사되면서 2~3초 안에 말발굽 형태의 튜브로 부풀어 오른다. 기존의 구조 장비는 크기가 크고 무거워 손쉽게 던지기가 어려웠다.

▶재활 의료 기구(Recovery Arm Sling)

석고 깁스를 장기간 착용할 경우 깁스 제거 후 적절한 재활 운동이 요구된다. 이 제품은 기존의 암슬링(arm sling, 석고 깁스를 감아서 목에 걸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과 함꼐 재활 치료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기구다. 자동차 안전 벨트와 같은 방식으로 팔 길이에 따른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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