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 vs 시국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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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민주항쟁 22주년을 하루 앞둔 9일 각계가 현 시국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으로 시작된 정부 비판에 대해 지지와 우려의 엇갈린 의견이 나왔다. 종교계와 문단도 가세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민주주의 후퇴를 지적하며 이명박 정부의 국정 쇄신을 요구했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일부 인사가 자신들의 목소리가 국민 전체의 뜻인 것처럼 포장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념적 갈등이 선명하게 표출되는 것에 대해 연세대 김호기(사회학과) 교수는 "양쪽으로 나뉜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정부가 결단을 내리고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9일 김선건 충남대 교수(右) 등 대전·충남 지역 11개 대학 216명의 교수가 대전 충남대에서 민주주의 후퇴에 따른 정권의 반성과 국정 쇄신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방 정치로 민주주의 후퇴”=동국대·경희대·강원대·전북대 등 40여 개 대학교수 1000명이 이날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과거 독재 권력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3일 서울대와 중앙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는 60여 개 대학 3000명에 이른다. 여기에 울산대·연세대 일부 교수가 조만간 시국선언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각계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22개 기독교단체와 교회는 이날 ‘복음주의권 기독단체 공동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은 기독교 장로로서 5년간의 짧은 세속 권력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더 두려워하고, 국민적 대의에 입각한 정치로 돌아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현 정부를 ‘무소통 기득권적 일방 정치’라고 비판했다.

불교계에선 불교인권위원회가 주축이 돼 ‘현 시국을 염려하는 불교계 108인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공동위원장 진관 스님은 성명서를 통해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경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오산”이라며 “국민을 가장 무섭게 여기고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할 때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밖에 학계에서는 300여 명의 역사학자가 참여한 ‘역사학자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진보 성향의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 189명의 시인·소설가·평론가들로 구성된 ‘6·9 작가선언’도 각각 현 정부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左) 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128명이 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부 교수의 릴레이식 시국선언을 우려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국선언은 분열과 갈등 조장”=보수 진영도 목소리를 높였다. 국정 쇄신에 대한 의견을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잇따른 시국선언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장무 서울대 총장은 이날 “서울대가 발표한 시국선언문에 서명한 교수도 있지만 의견을 달리하는 교수도 상당수 있다”며 “어떤 명분이 있다고 해서 선언문이 서울대 전체의 의견을 반영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교수는 동료들의 시국선언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날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 서울대 박효종 교수 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128명은 최근 일부 대학교수의 시국선언을 우려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4·19 혁명이나 6·10 민주항쟁 때 지식인들 사이에서 생겼던 강력한 공감대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선거 부정과 강압적 통치에 항거해야 한다는 시대의 절박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민주적 방식으로 정부의 정책을 따져 고쳐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보수 색깔을 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도 이날 서울 여의도 CCMM 빌딩에서 시국 조찬간담회를 열고 ‘국가의 현 사태를 걱정하는 한국 교회 원로 성명’을 발표했다. 방지일·조용기·정진경·이용규·엄신형 목사 등 개신교계 원로 목사 등 33명이 성명에 동참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정치적 공세의 빌미로 삼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 국회로 즉각 복귀할 것 ▶북한은 핵무장과 핵실험을 즉각 중단할 것 ▶자살에 대한 미화를 질책하고 생명 경시 풍조의 사회적 확산을 방지할 것 등을 촉구했다.

바른사회시민회의는 서울 명동 전국은행회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대한민국의 장래’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정부 규탄 위주의 추모 열기에 "논쟁의 여지가 많다”는 주장을 펼치며 시민들이 정치적 균형을 유지할 것을 호소했다.


백성호·이정봉·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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