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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중기 임직원들 보증공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재산세 납부실적 10만원 이상인 40대 대졸 남자' 어느 구인정보지에 게재된 한 중소기업의 경력직 (부장) 모집광고다. 신입 경력직원을 모집하면서 이 회사가 재산세 납부실적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은 금융기관들이 대출해 줄 때 보증인 요건을 갖춘 임직원의 보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 이후 기업부도가 속출하면서 금융기관들이 중소기업 대출때 이사 등 임원, 심지어 직원들에게까지 보증을 서도록 요구하고 있어 중소기업 임직원 사이에 '보증공포' 가 확산되고 있다.

어려운 회사사정 때문에 마지못해 보증을 섰다가 발목이 잡혀 재산을 날릴 처지에 놓인 임직원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말 부도를 낸 중견기업 S사 이사 4명의 집에는 온통 딱지가 붙어있다.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을 때 이들이 모두 보증을 섰다가 가압류된 것. 얼마 전 회사가 화의개시 결정을 받아 일단 강제집행은 면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모두들 마음 졸이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중소기업 D사는 최근 이사 2명이 그만뒀다.

회사가 금융기관으로부터 2억원을 대출받으면서 이사들에게 보증을 요구한 것. 두 사람은 보증을 서느니 직장을 그만두는 게 마음 편하다고 판단했다.

이같은 보증공포는 현직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퇴직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6월 K전자 전무로 있다가 퇴직한 朴모 (55) 씨는 회사에 있을 때 선 보증 때문에 빚더미에 오를 위기에 처했다.

퇴직하면 보증도 자동해지될 것으로 막연히 생각했던 朴씨는 최근 회사가 부도나자 연대보증책임을 지라는 난데없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회사를 그만둬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 이라며 은행측에 하소연했지만 "개별보증의 경우 이미 보증을 섰으면 퇴직여부와 관계없이 유효하다" 는 게 은행의 답변이었다. '보증의 사슬' 은 이처럼 질기다.

이에 따라 재산을 담보로 보증을 선 현직 임원중 다수는 마음대로 퇴직도 못한 채 속앓이를 하고 있으며 퇴직임원들은 뒤늦게 은행과 회사를 찾아다니며 보증해지를 애원하곤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증을 회피하기 위한 행태도 갖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 직원들 사이에서는 보증을 많이 서야 한다는 이유로 임원 되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부동산을 친인척에게 명의신탁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명의신탁을 통해 자신의 재산세 납부액수를 줄여 금융기관이 요구하는 보증인 요건을 피해 가자는 것.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연구원은 "아무리 중소기업이라 해도 주식회사라면 주주들이 유한책임을 지는 게 원칙" 이라며 "주주도 아닌 임원들에게 개인적인 입보 (立保) 를 세워 무한책임을 지운다면 공적 채무가 사채와 다를 게 뭐 있는가" 라고 비판했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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