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다시 보는 한국 경제발전 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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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년 전 유네스코에 부임할 당시에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한국의 경제.정치 발전 경험을 국제사회에 소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따로 별로 소개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제3세계에는 한국의 발전경험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만나본 수많은 제3세계의 사회과학자.시민운동가.관료 등은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이를 배우고 싶어했다.

*** IMF와 한국 좌파정권의 합작

지금까지 미국 중심의 사고에 젖어있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장만이 효율적이고 정의롭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주류 앞에서 한국의 발전모델은 사실 늘 뭔가 죄 지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차적으로는 그 경제발전 모델의 뒤에 독재정권이 있었다는 '원죄'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이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실패를 증명해 주는 듯했다. '정경유착'에서 오는 비효율과 부패가 경제위기를 몰고 온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 모델은 폐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외환위기는 좌파에 그동안 그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던 '개발독재'체제를 총체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개발독재는 독재만 한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에도 실패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내 좌파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외환위기와 미국이 대표하는 우파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의 논리와 맞아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을 앞세우는 시장주의자들에게 한국의 성공적인 개발국가 모델은 눈엣가시였다. 한국은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시장자유화와는 거리가 먼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지속적이고 공정한 경제발전을 수십년간 이어왔다.

따라서 IMF에 한국의 외환위기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한국에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곧바로 한국경제의 자유화.개방화.시장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는 IMF와 월드뱅크가 그동안 제3세계 국가들에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시장친화적인 '구조조정 정책 (Structural Adjustment Policy)'을 꾸준히, 집요하게 요구해 왔던 것의 연장선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계속해 집권한 한국의 좌파정권들은 IMF와 함께 한국 발전모델의 해체에 주력해 왔다. '개발독재'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한국의 좌파와 국제 신보수주의가 손을 잡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는 IMF와 월드뱅크의 경제정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빈부격차의 급격한 증가, 산업공동화, 자본의 해외유출, 두뇌유출 등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경험해온 모든 것을 이미 제 3세계 국가들은 지난 수십년간 지겹도록 경험해 왔다.

제 3세계를 빈곤과 저발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시장주의와 이를 대표하는 IMF 등의 국제금융기관이었음을 제3세계 국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차제에 한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 수용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정부가 다시 경제발전에 나서야 한다.

*** 정부, 다시 경제발전 나서야

물론 옛날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미 개발독재 모델의 핵심인 재벌들도 옛날처럼 정부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일도 아니고 노동자들도 옛날의 노동자들이 아니다. 더욱이 세계화와 시장화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진행된 가운데 과거의 '개발국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시장의 이름으로, 지난날의 이념의 이름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발전모델을 자진해 해체시키는 실수를 우리는 지금에라도 중단해야 한다.

함재봉 연세대 교수. 국제정치

◇약력:미국 칼턴대 졸업(경제학), 미국 존스홉킨스대 정치학 박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현재 파리 유네스코 본부 사회과학 연구 및 정책국 국장. 저서로 '탈근대와 유교-한국 정치 담론의 모색' '아시아적 가치'(공저) '유교 민주주의. 왜&어떻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