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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로 달려간 전공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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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공의 대표들이 14일 서울 을지로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자신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이 인권침해라며 진정서를 내기 위해서다.

전국 1만4000여명의 전공의들의 모임인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진정서에서 "전문의가 되려면 전공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점을 악용해 장시간 근로를 강요하고 근무환경도 열악하다"고 밝혔다. 협의회 관계자는 "우리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인권침해 실태를 고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도에 있는 한 종합병원의 내과 전공의 당직실. 일주일에 평균 100시간 이상 근무하는 전공의들로선 좁은 공간조차 정돈할 여력이 없는 듯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강정현 기자]

협의회는 ▶하루 16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근무시간▶여자 전공의가 법에 보장된 출산휴가를 다 사용하지 못하는 점▶여자 전공의들이 남자와 혼숙하는 점 등을 주요 인권침해 사례로 꼽았다. 전공의협의회 임동권 회장은 "주5일 근무시대가 활짝 열렸는데 이렇게 열악한 처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엄연한 현실"이라면서 "전공의의 노동 강도는 착취이며, 근무 환경은 인권 유린"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 남교선 인권위 공보관은 "전공의들의 진정 내용이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인지, 아니면 법이나 제도적 차원에서 개선할 대상인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국립병원에서의 인권침해라면 몰라도 일반병원에서의 문제는 조사 대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전공의들의 사용자 격인 대한병원협회 성익제 사무총장은 "전공의들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 중 상당 부분이 일리가 있어 병원장과 전공의 대표가 참여하는 협의회를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공의란=의과대학 6년을 졸업해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된다. 졸업 후 큰 병원에서 1년간 임상경험을 쌓는 사람은 인턴, 그 이후 3~4년간 전문 진료과목을 배우는 의사가 레지던트다. 이 둘을 합해 전공의라고 부른다. 6월 말 현재 275개 병원에서 인턴 3448명, 레지던트 1만1347명 등 모두 1만4795명이 근무하고 있다.

[격무 시달리는 전공의] 툭하면 밤 새워…수술 중 졸기도

14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의 한 대학병원 인턴 당직실. 너덧 평 됨직한 공간에 2층 침대 8개와 책상.사물함.신발장.샤워장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침대 여기저기에 양말과 수건 등이 널려 있다. 이 좁은 공간을 23명의 인턴들이 쓰다 보니 잘 때 어깨가 부딪히기 일쑤다.

이보다 사정이 좀 낫다는 가정의학과.흉부외과 레지던트 사무실. 사무공간 안쪽 귀퉁이에 2층 침대 하나를 놓고 당직실로 사용한다. 남녀 구분이 없어 사실상 혼숙이다.

이 병원 레지던트 K씨(26.여)는 "남자 동료들과 아래 위 침대에서 자다 보면 속이 상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출산휴가를 제대로 쓰는 여자 전공의는 거의 없다. 서울 강남의 모 대학병원 전공의 이모(27)씨는 2002년 3월 인턴 때 출산휴가(법정일수는 90일)를 40여일만 쓰고 출근했다. 병원 측에서 길어야 두 달밖에 못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공의협의회가 올해 초 회원 18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당 100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이 51.4%였다. 매일 밤을 새우는 사람도 7.7%나 됐다. 또 이들의 평균연봉은 2400여만원으로 조사됐다.

몸이 피곤하다 보니 진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S병원 레지던트 3년차 L씨(30)는 "밤을 새운 다음날 수술 부위 꿰매기 등의 보조를 하다가 졸기도 하고, 야간 당직 때 곯아떨어졌다가 호출을 못 받아 응급 처치가 지체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원인과 처방=전공의는 교육생이자 의사 근로자라는 이중의 신분을 갖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이동형(내과 3년차)씨는 "전공의 신분 임면권을 병원이 쥐고 있어 열악한 환경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비정규직 신분이다 보니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공의들은 8, 9월 노조를 만들어 대응할 방침이다.

병원도 할 말이 많다. 병원협회 성익제 사무총장은 "수가 (酬價.진료행위의 비용)가 낮아 장례식장이나 주차장 운영 수입으로 적자를 메우는 형편에 전공의 근로조건이나 대우를 무조건 올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말했다.

주요 선진국의 경우 전공의 교육비용을 정부 등이 부담하고 있다. 미국은 의료보험재정과 국고에서 전액을 부담하고, 일본도 올해부터 국고에서 전액 지원한다. 우리는 지난해부터 국공립병원에 근무하는 흉부외과.임상병리과 등 기피과 10개 과목 전공의 514명에게 월 50만원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이윤성(법의학)교수는 "전공의를 둘 수 있는 병원의 요건을 강화하고 전공의와 전문의 업무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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