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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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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표현의 자유가 만개한 사회에서도 억압은 존재한다. 밝은 세상의 어두운 측면이다. 막상 억압의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억압을 느낀다. 이런 억압은 자주 심리적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가 자기를 억압하는 것이다.

정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에서 억압이 일반화되면 '정보실패(Intelligence Failure)'가 빈발한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미국 상원 정보위가 파헤친 중앙정보국(CIA)의 정보실패가 생생한 사례다. CIA의 정보실패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크게 훼손시켰다.

정보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보기관의 전문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한 것은 '집단사고(Group Think)'였다. 집단사고는 조직의 전통적 믿음이다. 조직의 집단논리에 반하는 개인의 새로운 발견이나 해석을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문화다. 그 발견이나 해석을 표현하는 것은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이 전쟁은 '커브 볼'이 얘기를 했든 안 했든 일어나게 돼 있었다."

커브 볼은 이라크인 첩보원의 암호명이다. 그는 미 정보기관에 이동식 생물무기가 이라크에 있다는 첩보를 제공한 단 하나의 소스였다. 그의 첩보를 뒷받침하는 증거나 교차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정보들은 없었다. 놀랍게도 CIA는 커브 볼의 첩보 한 조각에 의지해 이라크에 대량살상 생물무기가 있다는 보고를 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유엔 안보리에 나가 이 정보를 제시하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그 당시에도 정보기관 안에선 커브 볼이 신뢰하기 어려운 소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파월 장관의 연설이 있기 며칠 전 한 정보분석관은 파월에게 커브 볼 첩보의 진상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앞에서 따옴표로 인용한 말은 이 정보분석관의 노력을 제지한 CIA 고위관료의 증언이다. 커브 볼과 관계없이 전쟁은 일어난다는 말이었다. 그는 정보분석관에게 대세를 거스르지 말라고 암시했다.

진실을 알리려는 개인의 노력은 'CIA는 이라크전을 치르기 위해 존재한다'는 집단사고 앞에 중단됐다. CIA의 정보실패를 보면서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은 집단사고의 억압에 눌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