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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대량감원 본격화…간판기업들도 '실직量産' 돌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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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근로자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 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위에서 부르면 괜히 가슴이 덜컥 한다.특히 대량감원 한파가 한때는 선망의 대상이던 대기업과 자동차.전자.중공업.건설 등 국내 간판업종을 중심으로 이뤄져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 감원의 현장 = 몇 명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두 개 사업부나 팀을 송두리째 날리는가 하면 정원 80명이던 조직을 10명 정도로 줄인 경우도 있다.기업들은 '말썽 안 나게' 줄이려다 보니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자회사 분리.생산라인 폐쇄.권고사직.계열사 전배.대기발령.직무대기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전자는 6월말 완료목표로 법인을 자동화사업.미디어사업.개인용컴퓨터 (PC).반도체조립 등 여러 개의 종업원 지주회사로 쪼개면서 1천3백여명에 대해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선별작업을 벌이고 있다.사업부를 폐쇄하거나 축소하면서 남는 인력을 줄이거나 계열사로 전배하는 회사도 있다.

삼성전자는 VCR라인을 폐쇄하는 등의 구조조정작업을 벌이는 한편 5백여명으로부터 명퇴신청을 받아 10일께 처리할 방침이다.

대우중공업은 지난달 철차.영업부문 잉여인력 1백여명을 계열사인 대우자동차판매로 전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수 인원이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사실상 강제성 명예퇴직도 있다.

굴지의 한 건설업체는 최근 과장~부장급 직원 1백여명에 대해 사업부별로 인원을 할당, 신청받아 대상자를 퇴직시켰다.감원과 감봉이 동시에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현대자동차써비스는 3천6백명을 감원하거나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는 방침을 노조에 통보한 뒤 지난달 7백56명을 희망퇴직방식으로 감원한 데 이어 노조와 감봉문제를 협의중이다.

지난해 명예퇴직을 실시했던 아시아나항공은 올해초 전사원을 대상으로 1개월씩 무급휴직을 실시한 데 이어 4월부터는 최장 1년짜리 장기 무급휴직을 도입해 5백여명이 휴직에 들어갔다.이 회사 李모 과장은 "감봉과 무급휴직 등으로 연봉이 지난해보다 절반 가까이나 줄었다" 며 "그나마 감원 안 당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 말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1백여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건설현장의 공사는 끝났는데 보낼 데가 없다 보니 새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 기본급의 80%를 주고 집에 무기한 대기시키고 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사람은 남고 그렇다고 자르기는 어렵고 해서 나온 고육지책" 이라고 말했다.이런 과정에서 노사간의 마찰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세진컴퓨터랜드가 2백여명을 희망퇴직방식으로 감원하자 당사자들이 "회사가 대상자명단을 미리 작성해 정리해고될 것임을 암시하면서 시행했기 때문에 강압에 의한 것" 이라며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9일 특별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2월 노사정위원회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부당해고가 급증하고 있다" 며 "올 임단협에서 고용안정협약 체결을 최우선과제로 삼아 관철되지 않을 경우 5~6월중 단식.총파업투쟁까지 불사하겠다" 고 밝혔다. '명예퇴직' 명분으로 공식퇴직금에다 얹어주는 '플러스 α' 도 예전에 비해 크게 초라해졌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퇴직금외에 최고 50개월치의 월급을 얹어 주는 곳이 수두룩했지만 요즘에는 많아야 12개월치가 고작이다.

3개월치만 주는데도 있다.한 종합상사 관계자는 "플러스 α로 3~6개월치만 얹어 주다 보니 내세우기가 민망스럽다" 면서 "자원자가 적어 개인면담을 통해 해고했다" 고 말했다.

◇ 앞으로가 더 문제다 = 문제는 앞으로의 상황이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데 있다.지금까지는 그래도 '명예퇴직'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앞으로 '정리해고' 방식이 동원되면 강도가 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달부터 주요기업의 단체협상이 속속 개시되기 때문에 정리해고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다.기업들은 일단 최악의 경영여건을 돌파하려면 대규모 추가감원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침체된 내수가 회복기미를 안 보이고 있고, 고금리체제가 올 하반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일본의 금융위기, 중국의 위안 (元) 화 평가절하 가능성 등 대외여건도 안 좋아 획기적 조치가 없는 한 경영개선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노동계는 해고회피 노력과 고통분담을 강조하고 있다.

일부 수출업체는 환율상승으로 여건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인원을 줄이는 등 편법을 동원한다는 것이 노동계의 지적. 또 군살빼기 차원을 넘어 '이 기회에 고임금 근로자를 물갈이하자' 는 식으로 필요 이상의 감원을 추진하는 기업도 있는데, 이럴 경우 오히려 근로자의 반발을 사 노사갈등을 초래함으로써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이재훈.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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