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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담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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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비행기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 있었다. 기내식을 끝낸 뒤 독한 코냑 한 모금을 털어 넣고 느긋하게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 여유라니…. 막힌 좁은 공간에서 경쟁적으로 뿜어대다 보니 여객기 뒤편의 흡연석 구역엔 늘 뿌연 연기와 함께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비흡연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겠지만 애연가들에겐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다.

골초들에게 장거리 해외여행은 큰 고역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2~3시간 이상의 항공여행은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정 불가피한 경우엔 항공 스케줄에 일부러 중간 경유지를 끼워 넣는다. 흡연실이 없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면 번거로운 출입국 절차를 거쳐 공항 밖까지 나갔다 들어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전면 금연을 실시하는 국제공항들이 대부분이지만 흡연실이나 흡연구역을 운영하는 공항들이 아직 일부 남아 있다. 갈수록 설 땅이 없어지는 흡연자들에게 이런 공항은 ‘인간적’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얼마 전 들렀던 인도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이나 베트남 하노이의 노이바이 국제공항은 시설은 열악해도 인간적인 공항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이 4년 연속 국제 공항 평가에서 1등을 한 데는 흡연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세계 어느 공항을 가 봐도 인천공항만큼 통풍 시설이 잘 갖춰진 흡연실을 넉넉히 운영하는 곳이 없다. 공항 흡연실 이용자들은 인종과 국적, 성별을 떠나 핍박받는 소수로서의 연대감을 공유하며 끈끈한 눈길을 주고받는 경이를 경험하게 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삼락(三樂)’이 독서, 집필과 함께 담배였다고 한다. 곁에 있던 경호원에게 “담배 있나”라고 물은 것이 이승에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봉하마을 동네 슈퍼에서 담배를 꼬나문 모습은 ‘인간 노무현’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도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흡연자들처럼 흡연과 금연 사이를 오락가락한 나약한 인간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담배를 끊어야 마땅하지만 번번이 금연에 실패하고 마는 나같이 모자라는 인간에게 담배를 피우는 노무현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작년 말 기준으로 한국 성인의 흡연율은 22.3%로, 성인 남자 10명 중 4명, 성인 여성은 100명 중 4명이 하루 한 개비 이상 담배를 피운다고 한다. 2007년 담배 판매액은 7조8000억원으로, 지난해에는 8조원을 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500원짜리 담배 한 갑에는 담배소비세, 지방교육세, 국민건강증진부담금, 폐기물부담금에 부가세까지 약 1500원의 각종 세금과 부담금이 포함돼 있다. 담배에는 40여 종의 발암성 물질을 비롯해 4000여 종의 각종 유해 물질이 들어 있다.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희생해가며 국세청의 봉 노릇을 한다는 의미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딱 끊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은 물론이고, 집안 식구들의 눈물 어린 호소와 구박, 심지어 협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배를 못 끊고 있으니 이쯤 되면 노 전 대통령처럼 죽음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는 고질병 아닐까 싶다. “아직도 못 끊었으면 별거야, 별거!” 며칠 전 아내는 국제전화로 최후통첩을 해왔다. 20일 후로 다가온 아내와 딸아이의 귀국이 나는 두렵다.

배명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