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함에 드리운 ‘盧 전 대통령의 그림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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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20면

지방선거는 늘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해 왔다. 정권의 레임덕과 유력 정치인의 부침도 지방선거라는 무대를 통해 주로 이뤄졌다. 바로 직전 선거였던 2006년에는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전북을 제외한 15곳에서 참패하면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선거 패배의 후폭풍은 노무현 정부의 정국 장악력 약화는 물론 분당이란 최악의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반면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날 피습을 당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깨어나자마자 “대전은요”라는 한마디 말로 선거 판세를 단번에 휘어잡았다. 이 사건은 그가 ‘선거의 여인’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방선거 D-365

2002년 지방선거 때도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이 패하면서 노무현 대선 후보는 후보 단일화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비해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명박 후보는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잃은 아픔을 딛고 대권 도전의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 수 있었다.

관심은 이명박 정부에로 쏠리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례는 총선재·보선지방선거대선으로 이어지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전철(前轍)이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덕분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예상 밖의 성과도 거뒀다. 모두 열린우리당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급함이 화를 불렀다. 4대 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민심을 잃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강한 반발에도 부닥쳤다. 여야 간 정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듬해 두 차례 재·보선에서 잇따라 참패했다.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이른바 ‘난닝구-빽바지’ 이념 논쟁이 가열되면서 당 내부 균열도 커져만 갔다. 결국 재·보선 이듬해인 2006년 지방선거에서 기록적인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데자뷔(Deja Vu·기시감)라고나 할까. 지금의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모습이 4년 전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모습과 흡사하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해 한나라당은 대선 승리의 기세를 몰아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 의기양양해진 여권은 속도전을 내세우며 각종 입법안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야당은 격렬히 저항했고 사회 곳곳에서 마찰음이 새어 나왔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친이-친박 갈등이 갈수록 거세졌다. 결국 총선을 치른 지 1년 만에 실시된 4·29 재·보선에서 0대5라는 예상외의 전패를 기록했다. 10월 재보선도 앞두고 있다.

‘총선 승리→오만→밀어붙이기→야당의 강력한 저항→이듬해 두 차례 재·보선 패배→내부 갈등 격화→그 이듬해 지방선거 참패’라는, 1년 단위로 바뀌던 열린우리당의 롤러코스터 운명이 4년 만에 똑같이 반복될 것인가.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마지막 화살표 단계인 지방선거에서도 4년 전 열린우리당과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여당 안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관건은 현재의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각종 여론조사는 당·정·청 쇄신을 요구하고 있다. 여론의 줄기는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모아진다. ▶통합과 포용의 통 큰 정치를 펼치고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를 지양하며 야당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고 ▶당 내부적으로도 친이-친박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정부와 청와대 인적 개편을 통해 쇄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요구다.

또 다른 변수도 있다. 내년 지방선거가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5월 23일)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치러진다는 점이다. 선거 막판 표심의 요동이 있을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수석 애널리스트는 “최근 여론조사 흐름을 보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던 중도층의 이탈 현상이 뚜렷한 가운데 기존 보수층도 친이-친박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이라며 “국정 쇄신과 포용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10월 재·보선은 물론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고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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