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만원짜리 의자 제공하고, 회장이 전화 받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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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24면

서울 정동에 있는 AIG손해보험 콜센터 전경. 벌집 모양의 자리 배치, 화사한 컬러 도입 등을 통해 상담원의 업무 효율을 높였다. 최정동 기자

지난 29일 서울 역삼동 신한카드 서울콜센터. 강원희(여·28) 주임은 고객과 통화를 마치면서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라는 끝인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상담원 강원희였습니다”라고 짧게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이 엄수돼 인사말을 바꾼 것이다. 강 주임은 “고객은 사소한 인사말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3兆 시장 콜센터의 진화

경력 7년차인 강 주임은 “콜센터 상담원은 오로지 목소리로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어 “업무 지식이 탄탄하고 고객 대응력이 있으면 간섭 없이 정해진 시간만 근무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자랑했다.

신한카드 서울콜센터. 이 회사는 업무 관련 질환에 대해 500만원까지 의료비를 지원한다. 최정동 기자

그러나 업무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콜이 들어오면 즉각 대응해야 한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민원을 해결해야 한다. 몸이 아파도 일을 미룰 수 없고, 화가 나도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 통화는 녹음되고 평가된다. 강 주임은 “이런 특수성 때문에 난청, 성대결절, 근골격계 질환 등 목·귀·눈·어깨에 이상이 없는 상담원이 거의 없다. 일부는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고 호소했다. 이렇게 말하는 강 주임 역시 말하는 속도가 일반인보다 빨랐다. 그녀는 “가벼운 직업병”이라며 웃었다.

전문 업체 3000개, 상담원 35만 명
콜센터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통신·금융회사를 중심으로 아웃소싱이 활발해지면서 2001년 2500억원 수준이던 시장 규모가 최근 3조원대로 성장했다. 전문 업체가 3000여 개, 전화 상담원만 35만 명에 이른다. 업무 영역도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전화를 받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지원 부서를 넘어 조사·마케팅·판매를 아우르는 역동적인 조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손욱 농심 회장은 매월 한 차례씩 핫라인에서 민원 전화를 직접 접수한다. 그는 “전화 한 통화로 평생 고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농심 제공

온라인 증권회사인 키움증권은 콜센터를 통해 월 4000억원의 거래를 성사시킨다. 온라인 주식중개(브로커리지) 시장에서 14%대의 점유율로 1위다. 이 회사에선 콜센터가 영업점 역할을 하고 있다. KTF가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인 ‘쇼’를 선보였을 때도 콜센터가 톡톡히 이름값을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초기 매출의 50%가량이 콜센터에서 나왔다”고 전했다.

문제는 이직률이다. 업종과 지역에 따라 상담원 이직률이 연 25~200%에 이른다. 심한 곳은 모든 상담원이 1년 만에 두 번 바뀐다는 얘기다. 콜센터운영자포럼 박종태 대표는 “낮은 급여 수준과 미흡한 복지 혜택, 의사소통 부조화, 불확실한 비전 등으로 인해 이직률이 높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끊임없는 반복 업무가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른바 ‘배려 경영’이 꼽힌다. 세심하게 배려하고 적절히 투자하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얘기다. 정기주 전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요즘처럼 불황기에 비용만 들어간다는 이유 때문에 찬밥 대우하기 일쑤인데 역으로 보면 적은 투자로 경쟁우위를 확보 할 수 있는 분야가 콜센터”라고 강조했다.

서울 정동 배재빌딩에 있는 AIG손해보험 콜센터. 이 회사 소정환 콜센터 총괄매니저는 “2005년 이곳에 입주했다”며 “접근성이 좋으면서 녹지가 충분한 곳을 물색하다 선택했다”고 말했다. 입지부터 꽤 고심했다는 얘기다.

AIG 배재센터는 좁은 공간에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기존의 닭장 같은 콜센터 구조와 전혀 딴판이다. 브이(V)자 모양의 책상이 지그재그 형태로 배열돼 있다. 책상 간격도 여유가 있어서 의자만 돌리면 간단한 회의를 할 수도 있다. 상담원이 하루 8시간가량 ‘의자와 산다’는 것을 감안해 소비자가격 40만원대인 ‘헤이워스’ 의자를 배치했다. 벽이나 칸막이에는 청록색·갈색·빨간색 같은 화려한 색을 입혔다. 상담원의 심리 상태를 밝게 만들기 위해서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는 통화음을 흡수하기 위한 조치란다.

소 매니저는 “일본 콜센터 업체에서 벤치마킹한 인체공학적 레이아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 콜센터 전문 디자인 회사가 없어 홍콩 업체에 의뢰한 것이라고. 그는 “상담원들이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만큼 밝고 즐거운 기분 상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적극 투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재센터 사무실은 300평 남짓. 이곳에서 170여 명의 상담원이 근무한다. 여느 콜센터에 비하면 두 배 이상 상담원 공간이 넓다. 이런 투자로 AIG손보는 꽤 쏠쏠한 성적표를 내고 있다. 2001년 다이렉트 마케팅을 시작한 이 회사는 600억원대이던 매출이 8년 만에 8배나 늘어났다. 소 매니저는 “전체 5000억원에 이르는 매출 가운데 20% 이상을 배재센터에서 올리고 있다”며 회사가 급성장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콜센터 경영을 꼽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퇴사율이 일반 보험회사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모든 성과를 콜센터 투자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콜센터 운영업체인 인우기술의 최양식 이사는 온라인 쇼핑몰 G마켓의 강경순 SM그룹장과 인력 충원 문제로 지난해 초 머리를 맞댔다. 전체 500여 명의 상담원이 한 달에 60명가량 퇴사하다 보니 회사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 인력을 선발하고 교육하는 데만 적잖은 투자를 해야 했다. 인우기술은 15억원을 들여 서울 봉천동에 있는 콜센터 시설을 개선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는 상담원이 근무하는 책상 폭을 100㎝에서 120㎝로 늘렸다. 또 상담원 간 정서적 유대를 조성하기 위해 책상을 두 개씩 붙여 놓았다. 선임자와 갓 입사한 사원을 함께 앉게 해 멘토링과 코치를 원활히 한다는 의도도 있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최 이사는 “지금은 퇴사자가 월 25명 수준으로 줄었다”며 “투자 효과가 이렇게 금방 나타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신한카드는 업무와 관련된 목·눈·귀 질환에 대해선 500만원까지 의료비를 지원한다. 이 회사 이재우 사장은 콜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휴게실 냉장고부터 열어 본다. 직원들의 복지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는 상담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자레인지·비데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과감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한 곳도 있다. 키움증권에선 시장점유율이 1% 늘어날 때마다 콜센터 직원에게 정액 보너스를 준다. 지난해 11월 온라인 시장 점유율이 16%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자 곧바로 180여 명의 콜센터 상담원에게 100만원씩 일괄 지급했다. 콜센터에서 성과를 인정받으면 본사로 전환 배치하기도 한다. 이 회사 기획실 주인 차장은 “본사 여직원 가운데 상당수가 콜센터 출신”이라며 “이 중에 간부급으로 승진한 사례도 여럿 된다”고 전했다.
현대해상화재보험은 지난해 근무평정 시스템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꿔 효과를 보고 있다. 자신이 최고 등급 평가를 받기 위해 하위 등급자가 필요한 구조가 아닌, 모든 직원이 최고 등급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이런 덕분일까. 이 회사 콜센터는 2006년 45.1%이던 이직률이 2007년 33%로, 지난해엔 21.2%로 떨어졌다.

“CEO가 관심 갖고 직접 챙겨야”
또 중요한 것이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애정이다. CEO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 손욱 농심 회장은 자사 콜센터인 ‘핫라인’에서 근무하는 상담원을 제주도 삼다수 공장에 견학 다녀오도록 지시했다. 친절한 응대는 기본이지만, 고객 최접점에서 일하는 만큼 회사 업무를 잘 알아야 하고 관련 네트워크도 충실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지난해 6월부터 임원들과 함께 매달 한 차례 핫라인 전화를 받고 있다. 손 회장은 “식품 첨가제 성분까지 묻는 고객이 있다”며 “회사로서는 평생 고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콜센터 상담 체험을 간부급까지 확대했다. 손 회장은 “콜센터로 접수되는 이슈야말로 전체 임원의 관심 사항이자 책임 사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원용 키움증권 사장도 콜센터에 많은 공을 기울인다. 콜센터 민원을 주로 다루는 VOC 회의에 반드시 참석한다. CEO가 이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2000년 설립 이래 이 회사의 전통이다. 덕분에 ▶본인 확인 절차를 7단계에서 3단계로 단축하고 ▶해외 주식 홈페이지를 개선하는 등 쏠쏠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전남대 정기주 교수는 “콜센터 상담원은 제품과 서비스의 교차점에 서 있는 회사의 대표 선수”라며 “상담원의 말 한마디에 충성 고객이 생길 수도, 그 반대 고객이 생길 수도 있어 CEO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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