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8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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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2장 길위의 망아지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뚜렷하게 투사되도록 수건으로 말끔히 닦아낸 다음, 목덜미까지 늘어뜨려진 머리숱을 자르기 시작했다.가위에서 잘려나간 검은 머릿결이 그녀의 발등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은밀한 장소에서 손수 자신의 머리채를 자르기는 이번이 세 번째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울에 비춰진 그녀의 눈가장자리에선 또다시 눈물이 번져나고 있었다.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선생님이 장가 들던 날 저녁 공부방에서, 그리고 이혼을 계기로 서울과 이별하기로 작정했던 날 저녁 불 꺼진 방의 화장대 앞에서, 그리고 세 번째인 오늘 밤은 간이목욕탕 안에서였다.

머릿결이 날카로운 가위 날에 잘려나가는 단절음이 귓불을 스칠 때마다 볼을 적시는 눈물은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그녀는 자른 머리를 다시 샤워로 헹궈낸 다음 옷을 챙겨 입고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찬장을 열고 음식 조리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마늘접시를 꺼냈다.그녀는 대여섯 개의 생마늘을 으적으적 씹어삼키며 봉환이가 누워있을 방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봉환은 아무런 채근도 없었다.그러나 필경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보여줄 알몸을 상상하면서 하지만 방금 목욕을 끝낸 여자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아닌 창자를 뒤집어놓을 것같이 역겨운 마늘냄새가 풍긴다면, 봉환은 어떻게 할까. 필경 그녀를 껴안고싶은 욕구가 삽시간에 위축되고 말 것이었다.일반적으로 마늘냄새는 남자의 발기조차 좌절시키는 묘약이었다.

자신의 이런 야비한 행동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고, 모순이었고, 사려깊은 행동은 더욱 아니었다.그를 희롱하자는 것에 불과하다는 자책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당장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그녀가 예상했거나 상상하고 있었던 모든 계략은 깡그리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녀가 술청을 서성대며 뜸을 들이고 있을 동안 봉환은 소리 지르며 채근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안의 분위기를 신방처럼 정돈해놓고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승희가 생마늘을 가마니로 먹었다 하더라도 입에서 풍기는 마늘냄새 따위에 질겁을 하고 비켜날 남자는 이미 아니었다.

아니, 그 냄새 때문에 봉환은 오히려 괴기스럽고 폭발적인 발기의 충동을 느낀 듯했다.승희가 좌정하는 그 순간, 그는 날렵하게 그러나 자제력을 보이면서 승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서툴렀지만 그렇게나마 순화되고 세련된 유혹은 봉환이답지 않은 대응이기도 했다.그가 이 때까지 보여준 잠자리의 상습적 매너는, 채권자처럼 뒤통수를 벽에 삐딱하게 기대고 누워 여자에게 옷을 벗으라고 거드름을 피며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따위 위압적인 태도는 여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반감과 모멸감만 안겨줄 뿐이라는 것을 봉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몰랐다.하찮은 마늘 몇 개로 봉환을 시험삼자 하였던 희망사항은 단 몇 분만에 연기처럼 사그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승희는 봉환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말았다.

봉환은 무척 예민하고 숙련된 손짓으로 그녀가 완전한 알몸이 될 때까지 속옷을 벗긴 뒤 이불깃을 덮어주었다.그리고 승희의 거부감이 자리잡고 일어날 핑계를 조금도 주지 않고 아주 천천히 그녀의 알몸을 다루기 시작했다.

똬리를 튼 채 굳어 있었던 승희의 오감의 지느러미가 포자처럼 터져나올 때까지 봉환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결국은 마른침만 삼키던 승희 편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끌고 말았다.

두 사람의 숨가쁘게 교차시키는 밀도있는 호흡이 이부자리 위로 깔리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마늘냄새 역시 방안 가득 차올랐다.격렬했던 순간들이 길게 흘러간 다음,가파른 숨결을 애써 고르던 봉환의 몸뚱이가 이불자락 밖으로 나가뒹굴면서 그 동안 참아왔던 명령조의 한 마디가 봉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구랍다 (졸립다) .불 꺼라.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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