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계간지 '한국학보' 속간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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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국학 연구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던 학술계간지 '한국학보' (발행인 김성재.69) .75년 일지사가 창간한 이래 한호도 빠짐없이 나오다가 지난주 이번 봄호 (90호) 를 끝으로 출판사정 악화로 기약없이 휴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계는 매우 우울했다.그런데 '한국학보' 가 계속 나오게 됐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화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만들어낸 쾌거다.휴간 보도가 나가고 뜻밖에도 반가운 소식을 전해온 것은 저 멀리 미국에서였다.

한 재미교포 기업가가 앞으로 3년간 매년 1천만원씩 적자분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 미국 실리콘벨리의 첨단 벤처기업 앰벡스사를 운영하는 이종문 (70) 씨였다. 미국 실리콘벨리 다이아몬드사의 명예회장과 스탠퍼드대학 자문교수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도미전 한국도서관법을 기초한 도서관 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졌던 인물. 고려대 민족문제연구소와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 각각 1백만달러와 1천5백만달러를 지원한 바 있는 그는 '한국학보' 의 휴간소식을 신문을 통해 보고 안타까운 나머지 본지를 통해 이같은 제의를 한 것. 물론 '한국학보' 의 휴간이 알려진 직후 서울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 학술지 편집위원인 신용하 (서울대.사회학).김윤식 (서울대.국문학).한영우 (서울대.한국사) 교수를 비롯 이 학술지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연구자 3백50여명은 원고료를 받지 않는 등 제작비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속간하는 방안을 논의중이었다.

미국에 체류중인 전경수 교수 (서울대.인류학) 도 이 학술지의 속간을 위해 미국.일본내 한국학 학자들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발벗고 뛰겠다는 의사를 편지로 전해오기도 했다.

이 학술지를 제작해온 제본소와 동국전산측에서도 속간을 위해 2년간 전산비와 제본비를 안 받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하지만 김사장의 마음은 괴로웠다.이런 제의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질 높은 논문만을 고집해 국내 한국학 관련 유명 연구자치고 이 학술지에 기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 학술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심 때문. 어떻게든 도움없이 6개월내 자신의 힘으로 다시 복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픈 마음을 달래준 사람은 다름아닌 편집위원 신용하 교수. 한 출판사가 시작한 학술지지만 이제 한국학 연구자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면서 모든 것을 사회에 되돌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을 설득해 결국 속간 약속을 받아낸 것. 속간 결정에 홀가분해 한 신교수는 "이 어려운 때의 '한국학보' 속간 결정은 작지만 우리 학계에 희망을 주는 상징적인 사건" 이라고 말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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