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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됐으니 이젠 머리숱 팍팍 줄어들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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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들은 혁명 동지회쯤 된다.

용인 KCC 체육관에서 함께 모인 왕년의 전우 김유택·강동희·허재(왼쪽부터). 선수 시절 코트에서 함께 불꽃을 피웠던 이들은 올 시즌부터는 프로농구의 지도자로 서로 경쟁하게 된다. [용인=김도훈 인턴기자]

1980년대 초록색 중앙대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 연세대와 고려대가 평화롭게 양분하고 있던 농구 코트에 불을 지른 사나이들이다. 재능과 악다구니, 의리로 똘똘 뭉쳐 10년간 농구계를 지배했다. 농구장에 ‘오빠부대’를 끌고 오고 프로농구까지 탄생시킨 그 이름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 그들이 다시 모였다.

2005년 허재(44)가 KCC 사령탑에 오른 데 이어 올해 강동희(43)가 동부 감독, 김유택(46)이 오리온스 코치가 됐다. 지난 25일 허재 감독이 이끄는 농구 국가대표팀이 훈련하는 용인 KCC체육관에서 그들은 프로농구 지도자로 제도권에 들어온 뒤 처음 만났다.

혁명 동지들이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형제보다 더 친했고 95년 기아자동차 시절 농구대잔치 우승을 위해 혈서를 쓰기도 했지만 올 시즌부터는 적이 되어 싸워야 한다. 김유택 코치는 두 후배 감독 모두 뛰어난 사령탑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둘 다 큰 게임을 많이 해봤고, 무엇보다 경기의 흐름을 매우 잘 읽는 선수가 아니었느냐”고 말했다.

강동희 감독은 “유택 형은 꼼꼼하고 까칠하며, 허재 형은 성격이 불 같다. 난 그 중간인데 개성 강한 두 사람이 지도자로선 더 유리한 것 같다. 감독이 필요하면 호통도 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허 감독이 “너는 호통 안 치냐”고 묻자 강 감독은 “외국인선수들까지 꼼짝 못하게 하는 형 호통하고 나는 수준이 다르죠”라고 말했다.

덕담은 길지 않았다. 강 감독이 먼저 허 감독에게 들이댔다. “형이 먼저 우승했지만 나중에 누가 더 잘될 지는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허 감독은 “감독 됐으니 너도 나처럼 머리숱이 팍팍 줄어드는 것 실감할 거다”고 겁을 줬다.

국가대표에 차출된 김주성(동부)을 놓고도 잠시 신경전이 일었다. 강 감독은 “대표팀에서 주성이를 얼마나 뛰게 할 건가요. 발목이 많이 안 좋은데…”라고 말하자 허 감독이 곧바로 받았다. “야. 하승진이도 없는데 주성이 없으면 어떻게 경기하니. 다치게는 안할 테니 걱정마라.” 냉정한 말에 강 감독의 표정이 잠시 뜨악해졌다.

훈련이 끝난 후엔 용인 죽전의 한 바로 옮겨 술잔을 기울였다. 강 감독은 “주량은 셋이 비슷했지만 자주 먹는 데는 허재 형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허 감독은 “기아 시절에는 큰 경기가 아닐 땐 경기 전날에도 속공에 나설 막내 김영만(국민은행 코치)만 남기고 회식을 하기도 했다”면서 “그래도 대부분 이겼다”며 웃었다.

알코올과 가장 친했던 허 감독의 얼굴이 먼저 벌개졌다. 김유택 코치는 “허재는 술먹은 다음 날은 점프를 10cm 더 뛴다면서 자주 술을 마셨고 술에서도 지지 않으려 했는데 요즘은 금방 나가떨어지더라”고 했다. 이어 “기아 시절 우리는 경기 중에 많이 맞았다. 삼성·현대에 있던 선배들이 우리를 못 이기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흐름을 바꿔보려고 거칠게 나왔다”고 회고했다.

허동택이 분열된 건 98년이다. 프로 원년이던 97년 허재는 최인선 기아 감독과의 불화로 경기에 뛰지 못했다. 강동희가 MVP가 됐고 연봉도 역전됐다. 1년 후 허재는 원주 나래로 팀을 옮겼다. “정든 팀을 두고 트레이드돼 원주로 갈 때는 귀양 가는 심정이었다”고 허 감독은 말했다. 허 감독은 오후 11시쯤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술이 좀 더 들어가자 강 감독은 “허재 형을 존경했고 이기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03년 플레이오프 4강전을 얘기했다. “나는 LG, 허재 형은 삼보 TG에서 뛰었다. 2승2패이던 마지막 5차전에서 전반에 18점을 이겼는데 후반 분위기가 역전됐다. 나를 수비하던 허재 형이 ‘야 쏴봐! 쏴봐!’ 하고 놀렸다. 그래서 화가 나서 쐈는데 들어갔는지 아닌지 기억이 안 나지만 경기에선 졌다”고 말했다.

강 감독은 “시즌이 시작되면 허재 형이 ‘야 이겨봐! 이겨봐!’라고 나올 것 같다”면서 “감독으로선 꼭 이기겠다”고 말했다.

30일 오후 4시 서울 흑석동 중앙대 체육관에서 열리는 중앙대 농구부 졸업생-재학생 친선경기에서 허동택은 모처럼 호흡을 맞춘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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