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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칼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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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이순신은 왜적과 맞서야 하는 전선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의 집요한 의심의 시선이란 또 다른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결국 이순신은 ‘죽음’으로 두 전선을 동시에 돌파했다. 그의 몸에 박힌 왜적의 유탄은 차라리 시시각각 조여 드는 임금의 음험한 의심과 그에 덧붙여진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마지막 전장에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스스로 택함으로써 이순신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다.

# 전격 출항해 적장 가토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아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목으로 압송됐던 이순신은 정유년 4월 초하룻날 한양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그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1권 18쪽)

#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내 적에 의하여 자리 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1권 71쪽) 이순신을 죽이면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없었기에 임금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이순신을 살려준 것은 왜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왜적과 싸우기 위해 나아가야 했다. 역설의 뒤엉킴이었다.

# 백의종군(白衣從軍)한 후 우여곡절 끝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올랐다. 하지만 그에겐 12척의 전선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이제 신에게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권 83쪽) 그는 12척의 배를 이끌고 “물이 운다” 하여 ‘울돌목’이라 이름 붙여진 명량(鳴梁)해협으로 나아가 죽기를 각오하고 일자진(一字陣)을 쳤다. “명량에서는…순류(順流) 속에 역류(逆流)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死地)였다.”(1권 77쪽) 그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파도 쳤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았다.

# “임금이 보낸 면사첩을 받았다…‘면사(免死)’ 두 글자뿐이었다…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1권 129쪽) 물론 이순신은 임금의 칼에 죽고 싶지 않았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러면 임금 자신은 물론 종묘사직도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쓰러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 왔다…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2권 196쪽) 우리 사는 게 전쟁이고 우리 삶터가 전장이다. 특히 남자는 전장에서 빠르게 나이를 먹는다. 이순신도 그랬고 노무현도 그랬다. 이제 이순신도 노무현도 더 이상 싸울 일은 없다. 그들의 싸움은 끝났다. 부디 편히 쉬소서!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