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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사냥꾼이 늙은 여우를 홀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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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서른여덟 살 ‘사냥꾼’이 예순여덟 해 묵은 ‘늙은 여우’를 포획했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바르셀로나의 우승을 이끈 과르디올라 감독이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로마 AP=연합뉴스]

28일(한국시간) 끝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주제프 과르디올라(바르셀로나) 감독이 알렉스 퍼거슨(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완벽하게 압도한 경기였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용감함과 끊임없는 훈련이 우승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경기에서 결코 비굴한 적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과르디올라의 경험 부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과르디올라는 ‘준비된 승부사’였다. 바르셀로나는 전반 10분 이후 경기 주도권을 완벽하게 틀어쥐었고, 후반에는 여유 있는 패스 플레이로 맨유 선수들을 농락했다. 그는 주전이 대거 빠진 수비진을 매끄럽게 봉합했다. 중앙수비수 푸욜을 오른쪽 풀백으로, 수비형 미드필더 야야 투레를 중앙수비로 내려 안정감을 찾았다. 큰 경기 경험이 없는 세르지 부스케츠를 과감히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한 용병술도 성공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다. 2-0을 만드는 메시의 쐐기 골이 터진 후반 25분, 경기장은 바르셀로나 팬들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지만 과르디올라는 교체 투입될 세이두 케이타에게 작전 지시를 하느라 경기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승부가 결정된 후반 47분 이니에스타를 빼고 페드로 로드리게스를 기용할 정도로 그는 주도면밀했다. 이러한 냉정함이 지휘봉을 잡은 첫해 ‘트레블’을 달성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선수로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 뒤 17년 만에 감독으로 또다시 우승을 이끌었다.

2007∼2008시즌 막판 바르셀로나 B팀(2군)을 맡고 있던 과르디올라는 A팀(1군) 감독 레이카르트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자신이 A팀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B팀에서 조련한 부스케츠, 로드리게스, 빅토르 산체스 등 ‘젊은 피’를 A팀으로 데리고 가면서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팀 분위기를 해치는 호나우지뉴, 데코는 과감히 정리했고 엄격한 신상필벌로 선수단의 기강을 잡았다. 첼시와의 준결승전을 고전 끝에 통과한 뒤에는 훈련 시간에 1분 늦은 메시를 비롯한 4명에게 500유로(약 87만원)씩의 벌금을 매겼다.

과르디올라가 무섭고 엄격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확정한 뒤 선수들이 좋아하는 인기그룹 ‘에스토파’를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결승전을 앞두고는 “너희들 각자가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라. 거만해져도 좋다”며 선수들의 기세를 한껏 부추겼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 선수 시절 요한 크루이프 감독으로부터 “과감하게 공격하면 승리와 가까워진다”는 소신을 배웠다고 했다. 이제 그가 바르샤의 ‘아름다운 축구’를 이끌고 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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