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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의 김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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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감독으로 하여금, 그 사람만을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배우는 어떤 배우일까.

김혜자는 “오랜만에 (센) 영화를 찍고 나니 느른하게 죽어있던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는 기분, 굳은 땅을 갈아엎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호형 기자]


어린시절 TV드라마 ‘여’에서 광기와 히스테리를 연기하는 김혜자를 본 봉준호는, 오랫동안 그녀를 위한 영화를 꿈꿔왔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내놓은 ‘마더’는, 날로 문제적 감독이 돼 가는 봉준호와 ‘국민배우’라는 헌사로도 부족한 김혜자의 조합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장수드라마 ‘전원일기’ 덕에 순박한 한국적 어머니의 전형으로 꼽히는 김혜자는 ‘마더’에서 광기의 극한을 보여주는 연기를 선보인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야수로 돌변하는, 동물적인 모성이다.

봉 감독은 “접신의 경지, 전율을 느꼈다”고 상찬했지만 그녀에게는 “뚫을 수 없는 벽을 느꼈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영화다. 최근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도 주목받은 ‘마더’는 ‘봉테일’이라 불리는 완벽주의자 감독과 만족을 모르는 완벽주의자 배우가 만나 빚은 세공품이다. 25일 오후 서울 홍대앞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국민엄마, 봉준호를 만나다=‘마더’는 김혜자의, 10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다. 최진실과 호흡을 맞춰, 자기중심적이고 신경질적인 엄마를 연기한 ‘마요네즈’ 이후다. “그간 영화 제의가 있었지만 TV 이미지와 비슷했어요. 나도 흥미없고, 보는 사람도 흥미없을.” 봉감독의 제의는 뜻밖이었다. “근사하게 본 ‘살인의 추억’의 감독이 나랑 일하자고 하니 그 자체가 행복했죠.” 실제 촬영까지는 4~5년 세월이 흘렀다. “다른 건 괜찮은데 내 모습이 나날이 늙어가는 게 걱정이라고 했더니 감독은 보이는 그대로를 담을 거라며 걱정말라 했어요.”

함께 일해본 봉 감독은 어떨까. “영리하고 천재적이죠. 머릿속에 모든 그림이 완벽하게 들어있고, 여러 가닥 촉수를 뻗치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너무 정확해요. 똑똑하니까 존경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얄밉더라니까.”(웃음)

◆만족을 모르는 국민배우, 벽을 넘다=‘마더’는 두말이 필요없는 관록의 배우 김혜자에게도 연기의 한계를 고민하게 한 작품이었다. “넘을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벽을 처음 느꼈죠. 내가 정말 배우인가 자책하며 죽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뷔페식당에서 변호사를 쫓아가는 장면은 18번, 후반부 하이라이트 장면은 31번 찍었다. 감독이 오케이 해도 “나를 봐주느라 적당히 그러는 것 같다”며 혼자 서럽게 울곤 했다. “지문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라는 게 있어요. 감독한테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한번 해보라 따지기도 했죠. 차에 들어와 막 우는데 감독이 달래러 들어왔기에 ‘위로 안 되니 나가라, 나중에 문자로 하라’고 했죠. 문자가 왔어요. ‘불만스러워도 세상이 환호할 때는 인정하십시오’라고요.”

“종종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못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아, 그건 생각나요. 감독이 ‘빨리 혜자선생님 진정시켜 드려’라고 했던. 내가 극중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그랬던 것 같애.”

베스트 장면으로 꼽히는 도입부 갈대밭과 엔딩의 관광버스 춤 장면도 그랬다. “춤을 잘 못춰서 탱고를 틀어놓고 스태프들한테 다같이 춰달라고 했죠. 근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까 스태프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냥 엄마가 그간 한 일 생각하면서 흔들리는 갈대처럼, 일렁이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움직였어요. 이미 그 사람을 겪은 제 몸과 마음이 절로 움직인 것 같아요.”

◆‘마더’이후=‘마더’의 엄마는 때론 야수가 된다. “엄마라면 자식을 위해 짐승 이상이 되잖아요. 그냥 이게 우리 엄마 아닐까요?” ‘전원일기’의 엄마와 ‘마더’의 엄마 거리는 생각처럼 멀지 않다는 뜻이다.

칸 레드 카펫을 밟은 소감을 물었더니 “우아하게 잘 올라가야지 그런 생각뿐이었다”며 특유의 소녀 같은 웃음을 날렸다. “‘마더’를 칸에서 처음 봤는데 얼마나 떨었는지 내내 아들(원빈) 손을 꼭잡고 영화를 봤다니까요. 보세요. 아직도 나한테 ‘마더’는 현재진행형이야. 빈이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 물론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기도 하는 자식이지만요. 개봉하고 나면 그제야 한차례 크게 앓을 것 같아.” 

양성희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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