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 모델 찾기] 전교생 65명 학교 ‘사교육 제로’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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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2일 저녁, 부산에서 낙동강을 건너 진해로 가는 2번 국도변에 자리 잡은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 녹산중학교. 주변은 캄캄하지만 교실마다 불이 훤하게 켜져 있다. 오후 9시 종이 울리자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운동장에서 기다리던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간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교는 많지만 중학교는 드물다.

부산 녹산중학교 전 교사가 한자리에 모여 ‘사교육 0’ 도전 결의를 다지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강관우 교장, 이혜인·노은희·박경록·송귀련·김학영·박기향·이현우 교사, 이범준 교감, 천오형·박국애·유지연·이경나·이승일·이종구·다니엘 셀레만·성재경 교사. [부산=송봉근 기자]

전교생 65명에 교사14명인 ‘미니 학교’인 녹산중이 ‘사교육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 1·2학년 각 2학급, 3학년 3학급으로 전체 7학급이다. 학급당 학생 수는 7∼12명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오전 8시20분까지 등교한다. 정규 수업이 시작되기 전 30분 동안 EBS 영어듣기 수업을 받기 위해서다. 정규 수업을 마치면 오후 3시30분부터 오후 5시10분까지 수준별 보충수업과 특기적성교육이 이뤄진다.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국어·영어·사회·과학 과목을 2개 반으로 편성한다. 실력이 뒤처진 학생들을 위한 기초학력 지도반 2개 반도 운영한다. 야간자율학습도 진행 중이다.

녹산중의 사교육 제로 도전은 이 학교 이범준(50) 교감과 천오형(51) 연구정보부장의 발상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3월 실시된 ‘국가 수준 교과학습 진단평가’ 에서 녹산중의 수준은 하위권으로 나타났다. 부산시 외곽에 자리 잡은 여건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부산 시내로 빠져나간 탓이었다. 1980년대 초에는 전교생이 600여 명이었지만 녹산공단 개발로 주거 지역이 사라지면서 학생들의 이탈이 늘어났다.

이에 이 교감과 천 교사는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을 위해 뭔가 해주자”며 머리를 맞댔다. 기초학력을 높이기 위해 정규 수업 전후로 EBS 영어듣기 수업과 수준별 보충수업을 해주자고 제안했다. 학부모의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교사들에게 수업수당을 줄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4차례의 전체 교사회의 끝에 시행키로 했다.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는 한 푼도 받지 않고 교사들이 자원봉사하기로 했다. 천 교사는 “처음엔 교사들 반응이 시큰둥했으나 똘똘 뭉쳐 사교육 없는 학교로 만들자는 데 의기 투합했다”고 말했다.

올 들어 강관우(56) 교장이 부임하면서 수준별 보충수업과 특기적성교육 외에 야간자율학습도 도입했다. 학생들의 희망을 받아 2개 반(1·2학년과 3학년 반)으로 편성했다. 교사 2명은 오후 9시까지 감독을 맡는다. 교장·교감은 학생의 안전한 귀가를 돕기 위해 남는다. 65명 중 48명이 신청할 정도로 인기다.

오후 6시10분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는 야간자율학습에는 낮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과제를 내준다. 이 과제를 모두 해야만 귀가할 수 있다. 김정빈(14·3년)군은 “낮에 공부한 내용을 스스로 익히며 궁금한 점은 선생님께 물어볼 수 있어 성적이 올랐다”며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학교 측의 조사 결과 1년 전 전교생의 약 70%가 학원을 다녔으나 지금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의 성적도 모두 올랐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않고도 성적이 오르자 학부모들이 반기고 있다.

교장·교감은 업무가 늘어난 교사들에게 조금씩의 수당을 주려고 주변 기업체와 관공서를 찾아 다녔다. 지난해 부산·경남 경마공원과 강서구청 등에서 1180만원을 지원받았다. 강관우(56) 교장은 “수당을 거의 받지 않고 열정적으로 자원 봉사하는 교사들과 이를 믿고 따라주는 학부모들이 학교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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