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산하 우리풍물]10.여주 도예촌 재래식 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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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조마구 (평북지방 방언으로 주먹을 뜻함) 와 부채마치로 맞두드려 독을 올릴 때 퍼뜩 조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친 아내의 환영이 떠오른다.

…〈중략〉…. 전 (독이나 화로의 윗부분) 을 잡은 손이 떨려 가뜩이나 제일 힘든 마무리의 전이 잘 잡혀지지 않는다.

송영감은 쓰러지듯이 짓던 독옆에 눕고 말았다.

' 황순원의 소설 '독짓는 늙은이' 에 나오는 대목이다.

마당 한켠에 있던 장독대에서 어머니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뚜껑을 열고 김치며 고추장이며 된장 등을 꺼냈다.

그래서 독의 많고 적음으로 그 집안의 규모를 짐작하기도 했다.

그만큼 옹기는 옛부터 우리 생활에 있어 빼놓아서는 안될 생활용품이었다.

6대째 옹기를 만들고 있는 '오부자 토기 (0337 - 82 - 9334.경기도여주군금사면이포리)' 의 주인 김일만 (58) 씨. 그는 "도자기는 전기물레를 돌리면서 표면을 깎지요. 그러나 옹기는 발로 틀을 돌리는 수동물레인데다 양손을 이용해 표면을 얇게 펴기 때문에 보기보다 만들기가 힘들다" 고 말한다.

'점 (옹기) 쟁이' 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장소를 옮겨다닌다.

그래서 안동이 고향이었던 김일만씨 집안도 옹기를 만들기 위해 정처없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김일만씨 가계 (家系) 의 '점쟁이' 역사는 6대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안동에서 시작해 충북 진천을 거쳐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이 40년전 일이다.

"요즘이야 그런대로 대접을 받지만 옛날에야 어디 점쟁이를 사람으로 취급이나 했나요. 그래도 이 짓으로 어렵게나마 5남매를 키웠으니 부모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옹기굽는데 40년을 바친 김씨. 이제는 흙만 봐도 성질을 알 정도로 이 분야에서는 꼽아주는 베테랑이다.

지난해에는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으로부터 기능전승자로 선정됐다.

김씨가 만드는 옹기의 종류는 수백가지. 그중 주로 사찰에서 사용하는 큰 독은 서너개를 만들면 하루 해가 진다.

무게만도 80㎏이 넘어 틀에서 옮기는데 두 장정이 낑낑 맬정도다.

그래서 지금은 네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아버지를 돕고 있다.

옹 기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을 어떻게 지피느냐에 따라 제품의 질이 결정된다.

그래서 옛부터 옹기점에서는 잘 굽는 것을 제일로 쳤다.

불을 잘못 지펴 온도를 못맞추면 옹기가 가마속에서 깨져버린다.

김씨도 "1년간 만든 옹기의 절반은 가마속에서 깨져버릴 정도" 라고 어려움을 말한다.

10년전만 해도 여주군 관내에는 재래식으로 옹기를 만드는 곳이 1백50여개를 헤아렸다.

요즘은 대다수 업체들이 작업하기 손쉬운 기름가마로 옹기를 굽는다.

그러나 기름가마를 이용하면 흙이 골고루 익지않아 옹기가 힘이 없다는 것이 흠이다. 기름불을 이용하면 도자기처럼 표면이 매끄러운데 반해 장작불은 표면이 거친 것이 특징이다.

옹기를 만드는데 납을 사용하면 광채가 잘 난다.

납을 사용해 광택이 나는 옹기가 등장한 것은 6.25동란이후의 일. 그 바람에 재래식 방법으로 옹기를 만들었던 김씨네는 옹기가 팔리지 않아 한때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고 있다.

그래서 재래식으로 옹기를 제작하는 것에 대한 김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해마다 장 담글때면 독을 사러 온다는 정해성 (53.경기도이천시부발읍.농사) 씨는 "장독은 숨을 쉽니다.

프라스틱통에 고추장을 담으면 곰팡이가 나지만 독에다 넣어두면 아무리 오래 두어도 맛이 변치 않는다" 며 옹기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다. 이천이 '도자기의 고장' 이라면 여주는 '생활자기의 메카' 다.

여주에는 현재 생활자기를 만드는 곳이 6백여개나 돼 세계 최대 규모의 도예촌을 형성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만도 2천억원을 넘고 있다.

여주의 도자기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사옹원 (司甕院)에 예속된 관요 (官窯) 를 약 2백80년전 분원 (경기도광주군남종면) 으로 옮겼다.

특히 여주의 싸리산은 고령토 생산지로 광주분원과 가까워 각광을 받았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신자들이 옹기 굽는 것을 호구지책으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글·사진 = 김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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