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신임, 탄핵, 그리고 대연정 … 5년 내내 승부수 던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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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바위 위에 선 노 전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담배, 있는가"그러나 없었다. 경호원은 마지막 소원조차도 들어주지 못했다. 순간 머리 속으로 무슨 생각이 스쳤을까.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는 묵은 속담이었을까. 아니면 집을 나오기 전 컴퓨터에 남긴 유서 속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글귀였을까. 세상에 나서 흔적을 남긴 기간이 62년 하고도 9개월.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한 길이었다. 박수 치는 사람들 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잠시 눈을 감았을까. 봉화산 부엉이 바위를 훌쩍 떠난 육신은 귓전에 ‘휙’ 바람 소리를 남겼다. 노무현 드라마의 끝은 너무 잔인했고, 충격적이었다.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이만큼 논란을 부른 이름이 또 있을까. 정치를 승부라고 생각했던 사람. 지난해 2월 대통령직 5년을 끝내고 귀향해서는 “시장이나 밥집, 극장에도 가고 싶다. 대통령 하는 동안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못 가는 게 제일 답답했다”고 했던 사람.하지만 퇴임한 지 1년 만에 터진 박연차 게이트는 그가 자랑해 온 도덕성이라는 명예를 물어뜯었다. 대중 속으로 가는 길도 막았다.

4월 30일 아침 검찰 조사를 받으러 떠나는 전직 대통령의 몸은 너무 왜소해져 있었다. 그는 “면목이 없습니다. 실망시켜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대중들 앞에 보여진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고독했고 말수를 잃었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유서 속의 글에서 그는 “책을 읽을 수도 없다”고 괴로워했다.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전날 내린 비로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새벽. 그는 경호원 한 명만이 지켜보는 죽음을 택했다.

풍운의 5년
“정말 욕 먹는 일은 싫다. 그게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욕이건 나를 싫어하거나 헐뜯기 위해 하는 욕이건 참으로 싫다. 그러나 정치라는 게 본래 열 명한테 칭찬을 들어도 반드시 누군가 한 명한테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19페이지)

2003년 2월~2008년 2월. 대통령 노무현의 5년은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승부사 기질과 비주류 의식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국회와 충돌했고, 검찰과 싸웠으며, 언론과 갈등을 빚었다. 지난해 2월 국무위원들과의 마지막 간담회 때 그 스스로도 “파란과 곡절의 연속”이라고 규정했다.

2003년 3월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용한 데 대해 검찰의 반발이 들끓자 노 전 대통령은 ‘평검사와의 대화’란 초유의 TV 이벤트를 만들어 정면 돌파했다. 그가 검사들을 향해 던진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냐”는 발언은 시중의 유행어가 됐다. 그해 10월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로부터 ‘당선 축하금’ 11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재신임을 받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 이후 불법 대선자금 문제가 본격화되자 “한나라당이 쓴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 1보다 더 썼다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2003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는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를 밝혀내 한나라당을 그로기 상태로 몰고 갔지만, 노 전 대통령도 최측근인 안희정·최도술씨가 구속당하는 타격을 입었다.

탄핵과 부활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속했던 새천년민주당의 틀로는 새 정치 질서를 창출하기 어렵다고 봤다. 호남 기반이란 한계가 워낙 뚜렷하고, 진보적 컬러도 미지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여권 신주류는 노 전 대통령의 지원사격 아래 민주당을 뛰쳐나와 2003년 9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여권 지지층을 분열시키는 정치적 도박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민주당이 ‘선거 개입’을 문제 삼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을 밀어붙였으나 민심의 역풍을 불렀기 때문이었다.대대적인 ‘노무현 구하기’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열린우리당은 한 달 뒤인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확보해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헌법재판소는 그해 5월 12일 탄핵안을 기각했다. 노 전 대통령은 탄핵당한 지 63일 만에 복귀했다. 그 무렵이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절정기였다.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2004년 9월 정기국회부터 국가보안법·사립학교법·과거사법·언론법 등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을 들고 나와 박근혜 체제의 한나라당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였다. 2003년 카드 대란으로 신용불량자가 400만 명에 육박하면서 본격화된 경기 불황은 해를 넘기면서 심해졌다.

여기에다 ‘버블 세븐’이란 신조어를 낳으며 부동산이 뛰기 시작한 게 노무현 정부 지지율에 치명상을 입혔다. 정부는 5·8 대책→10·29 대책→8·31 대책 등 연이어 극약 처방을 내놨으나 오히려 부동산 폭등세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부동산만은 확실하게 잡겠다”고 했으나 1년 뒤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며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노 전 대통령의 잦은 설화(舌禍)도 지지율 하락에 한몫했다는 평가를 낳았다.

대연정과 분열
노 전 대통령은 국면 전환 카드로 ‘대연정’을 꺼냈다. 2005년 7월 그는 “선거 제도를 고치는 조건으로 한나라당 주도의 대연정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대연정은 실질적으로 정권교체 제안”이라며 “지역 구도 해소가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도 이뤄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승부수는 실패했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는 철저히 대연정을 외면했고, 여당 지지층 내부에서만 혼란이 벌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대연정에 대해 “수류탄을 (한나라당에)던졌는데 그게 우리 진영에서 터져버렸다”며 “나의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였다. 아주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가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16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12곳을 휩쓴 반면 열린우리당은 전북 지사 한 곳만 당선시켰다. 이후 7·26, 10·25 재·보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은 연패했다. 정동영·김근태 등 여권 핵심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신당 창당에 나섰다. 2007년 노 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뀌는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는 그해 4월 연임제 개헌을 들고 나왔으나 여권 내부에서조차 거의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김정일과의 만남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그의 임기 마지막을 밝힌 하이라이트였다. 노 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넘은 뒤 육로로 평양을 찾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 시내 광장에서 그를 맞았다. 두 정상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3, 4자 정상회담 추진 등의 합의를 담은 10·4 정상선언을 발표했다.

임기 말 노 전 대통령은 의외의 선택을 한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타결 지었다. 당시 그의 선택에 진보 지지층은 “배신”이라며 들끓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한·미 FTA는 정치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라며 “민족적 감정이나 정략적 의도를 가지고 접근할 일은 아니다”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한·미 FTA는 정권을 넘겨 미제로 남아 있다.
 그는 재임 중 종종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과연 어느 쪽이었는지는 이제 역사의 평가로 남게 됐다.

박승희,김정하,임장혁 기자 pmas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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