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씨전·선종영가집…조선전적이 고려작품 둔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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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전적 (典籍) 2점이 조선시대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이 사실은 보물로 지정된 책과 똑같은 판본이 최근 발견됨으로써 확인됐으며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의 전적은 지난 94년 보물 제1208호로 지정된 '춘추경좌씨전구해 (春秋經左氏傳句解.춘추좌씨전)' 와 지난 87년 보물 제641호로 지정받은 '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 .이번에 경남양산시 대성암 (주지 원진스님)에서 같은 판본의 고서들이 발견됐으며 이들과 비교하면 보물지정을 받은 책들의 간행시기는 고려때가 아닌 조선시대임이 확인된다.

'춘추좌씨전' 은 보물로 지정된 책과 새로 발견된 책이 내용과 쪽수는 똑같은데 간기 (刊記) 부분의 연호 (年號) 중 글자 하나만 다르다.

새로 나온 '춘추좌씨전' 의 간행연도는 '선덕 (宣德) 6년' 인 반면, 인천 중앙길병원내 가천 (嘉泉) 박물관 소장인 보물 지정 '춘추좌씨전' 은 '선광 (宣光) 6년' 으로 돼 있다.

선덕 6년은 조선 세종 13년으로 서기1431년이고 선광 6년이면 고려 공민왕 23년으로 서기 1374년이다.

따라서 '덕' 자를 '광' 자로 글자 하나를 바꿈으로써 보물지정을 받은 '춘추좌씨전' 은 고려시대 문화재로 둔갑한 것. 당시 李정섭 문화재전문위원이 쓴 전문가의견서에는 "고려 공민왕 23년에 경상도 관찰사 조치 (曺致) 와 도사 (都事) 안질 (安質) 의 주선으로 청도 (淸道)에서 출간한 책" 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치' 는 '조선왕조실록' 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인물로 세종 10년 한성부윤에 오른 뒤 세종1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李씨는 "당시 자료를 충분히 확인하지 못했다" 고 말했다.

'춘추좌씨전' 은 유학에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와 더불어 5경으로 불리는 '춘추' 를 풀이한 책으로 경서 연구뿐만 아니라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은 책이다.

한편 '선종영가집' 은 맨 뒷부분에 '조선조 세조때 세자로 책봉됐다가 즉위 전에 요절한 덕종의 비 (妃) 인 인수대비 (仁粹大妃) 의 발원으로 간행했다' 는 간기를 빼고는 보물 제641호와 똑같다.

따라서 이 책은 고려시대 목판을 그대로 찍으면서 발원문만 따로 조선조의 초주갑인자로 찍어 합쳤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겸로씨 소장인 보물 제641호는 인수대비 발문 부분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됐거나 유통과정에서 고려시대로 앞당기기 위해 고의로 마지막 부분을 떼어냈을 수도 있다.

특히 광곽 (匡郭.고서에서 쪽마다 글 내용을 둘러싼 두꺼운 선) 의 상태로 보아 보물로 지정받은 책이 나중에 찍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책이 보물로 지정되던 당시의 전문가의견은 문화재관리국에서도 찾을 수 없고 각종 문화재자료에는 보물로 지정된 책의 마지막 부분만을 바탕으로 고려 우왕 7년 (1381년)에 발간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종영가집' 은 당나라의 승려 영가사문현각 (永嘉沙門玄覺) 이 선종 (禪宗) 의 세계를 설명한 책으로 우리나라 선림 (禪林)에서도 널리 읽혀 왔다.

남권희 (南權熙.경북대.서지학) 교수는 "이 책들이 조선시대에 간행됐다고 해서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고서의 유통과정에서 누군가가 값을 높이기 위해 손을 댄 것 같다" 고 설명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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