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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로 가득한 일상 탈출은 꿈꾸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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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소설가 박성원(40·사진)씨가 4년 만에 소설집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문학동네)를 펴냈다. 소설집은 붙들고 있는 화두가 ‘체제의 완강함’쯤 된다. 연작으로 읽히는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 1·2’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1·2’ 등 네 편과 ‘몰서’ 등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이 대체로 현 사회체제의 부조리,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가능성 등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음악의 주조음(主調音)처럼 소설집 안에서 반복해 나타나는 현실 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런 인식은 작가 박씨의 현실 인식일 것이다.

우선 사람은 누구나 시간 안에 머무는 존재로 정의된다. 시간 바깥으로 나가면 사실상 죽음이다. 진위가 헷갈릴리 없는 생물학 명제 같지만 여기서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법과 제도, 체제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현대사회의 지탱 원리 같은 것이다. 이 시간 안에서는 모든 게 시간 싸움이다. 당연히 생산과 효율이 중시된다. 사람은 이런 ‘시간 체제’에 동의하고 노예를 자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믿는 것을 함께 믿는 게 속 편하다. 시간 밖의 대안 세계로 “뒤돌아보면 발자국이 사라지는 유목민의 삶”이 제시되지만 소설집 안에서 그런 삶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이런 주조음 위에 펼쳐지는 것은 온갖 부조리한 삶의 모습들이다. ‘캠핑카를 타고…1’에서는 거액의 로또 복권 당첨금 때문에 누나가 남동생을 배신한다. ‘도시는 무엇으로…1·2’에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를 납치해 성매매를 시키는 악당이 등장한다. ‘논리에 대하여’는 ‘안전한 모험’의 방편으로 바람을 피우던 변호사가 끔찍한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되는 이야기다.

반복되는 ‘현실 고발’이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씨는 새로운 소설 형식 실험, 실감나는 사건 묘사 등으로 생기를 불어넣는다.

표제작 ‘도시는…’은 뫼비우스 띠처럼 소설 속 시간이 이어지는 묘한 작품이다. 아내의 죽음을 맞은 ‘그’는 담배와 술을 사러 나갔다가 자신을 아빠로 착각하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를 만난다. 한데 이 여자아이는 그의 아내임이 암시된다. 환상적인 요소를 갖춘 소설의 마지막 대목, 여자아이는 도로를 건너는 코끼리를 목격한다. 코끼리가 동물원을 탈출했다는 라디오 뉴스가 나온 직후다.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순간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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