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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당국 '진실게임'할 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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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고(故) 김선일씨가 테러에 끔찍하게 희생된 사건에 온 국민이 깜짝 놀라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 사건의 책임론이 제기됐고, '진실 게임'이 불거지면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 마당에 이라크 추가 파병이 옳으냐는 문제도 제기됐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김선일씨는 테러에 희생된 것이다. 그가 선교를 나갔건, 그가 납치된 것을 누가 언제 알았건 그의 희생의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은 테러다.

미국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뉴욕 쌍둥이 건물에 민간 비행기가 돌진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낸 엄청난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본토에 감행된 전대미문의 테러 공격에 미국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또 있을지도 모를 테러 공격에 대한 철저한 대비였다. 이에 정부.언론.국민이 일치 단결해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위기 속에 미국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았다. 미국은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테러 공포에 떨며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분열하지 않고, 미국인들은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똘똘 뭉쳤다.

미국은 모든 주요 시설에 대한 경계 및 보안 조치를 취했다. 당장 최고 높은 테러 위험 등급을 발표했고, 공항 보안 조치를 높였다. 공항 출입국 검사 조치를 강화했다. 폭탄 탐지 시설까지 들여와 안전점검 체제를 바꾸는 데 주력했다. 테러 공격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정보기관들에 대한 책임 추궁에 서두르기보다 힘을 합해 테러 조직을 찾아 나섰다. 미국 내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알카에다 조직원을 찾아 나섰고 해외 테러 조직의 유입을 막고 그들의 금융자산을 동결했다. 학생 비자를 위한 I-20 서류 발급도 전자발급 방식으로 바뀌었고 외국인 학생 등록이 강화됐다. 그렇게 하고 나서 1년 정도 지난 시점에 테러분자들의 항공교육과 입국을 가능하게 한 미국 내부 시스템의 문제,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의 테러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과 대처 능력의 문제를 다루었고, 책임론도 제기됐다.

김선일씨가 테러에 희생된 만큼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테러에 따른 희생을 막는 것이다. 이에 우리의 온 힘을 다해야 할 때다. 특히 추가 파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테러에 대한 대비에 모두 쏟아도 오히려 부족할 때다. 테러 세력을 우리의 힘으로 깨뜨리지 못한다면, 그 테러 세력에 더 이상 희생되지 않도록 대비할 때다. 추가 파병될 이라크에 있는 우리나라 공관은 우리 재외국민의 안전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 협조하는 데 바빠야 한다. '은폐' 의혹의 궁금증을 푸는 조사로 신경을 빼앗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시급히 재외국민 보호 체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할 외교통상부, 그리고 파병될 군인들의 안전에 보다 높은 수준의 대책을 마련하고 필요한 세부 조치를 취하는 데 분주해야 할 국가정보원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과거의 '진실 게임'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대의기관인 국회는 국민에게 있을 수 있는 국내외 테러 가능성에 정부가 만반의 대비를 하도록 독려해야 할 때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나서, 김선일씨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 간접적인 책임도 우리 내부에서 따져야 한다. 잘못이 있는지 조용히 따지고, 있다면 냉철히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은 우리 내부의 잘잘못을 따지고 공방하기보다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에 우선 대처할 때다. 그것이 미국의 9.11 테러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이라고 본다.

김병호 외교부 구주국 심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