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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나쁜 여자 되면 속 시원합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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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모 씨(뒷모습)가 이순신 고택 경매 등 최근의 사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월간중앙“저 내일 통화 안 되면 구속된 줄 아세요.”

단독인터뷰 - 충무공家 종부, 사기 혐의 구속 직전 4시간 반 ‘마지막 눈물고백’ #동업자에 치이고 문중에 버림받고 … 죽고 싶은 봄이었습니다

5월13일 10시쯤 통화에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이튿날 아침 이순신 가문 종부 최모(53) 씨의 전화기는 발신음이 몇 번 울리다 끊겼다. 그와 사업을 함께하던 한모(61) 씨의 전화기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확인한 것은 오전 11시 무렵 인터넷에 뜬 통신사의 뉴스를 통해서였다.

그는 투자자 2명을 속여 21억 원을 받아 챙긴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로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전날 법정에서 잠깐 나와 건 통화에서 “고소한 상대 쪽이 워낙 준비를 꼼꼼히 해서 증거가 없는 이쪽으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판”이라고 호소했다.

어쩌다 겨레의 영웅인 충무공 집안의 며느리가 옥살이까지 하게 됐는가? 충무공 탄신일(4월28일)에 가진 인터뷰는 그래서, 바깥에서 한 그의 마지막 고백이 돼버렸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종부로서는 잔인한 봄이었다. 사업 빚에 몰려 경매에 넘어간 아산 현충사의 고택 땅은 5월4일 2차 경매에서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의 문중인 풍암공파 종회에서 낙찰받았다.

문중에서 샀다고는 하지만, 종부로서는 가문 앞에 면목없는 며느리로 남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그는 충무공파 종회(회장 이재왕 씨)와 또 다른 법정싸움을 벌이고 있다. 종회에서 종부가 소유한 충무공 관련 유물을 임의로 팔지 못하도록 하는 유물처분금지가처분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5월8일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첫 심문이 있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 혐의로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4월28일 오후 1시 반. 충무공 탄신 464돌을 맞던 날, 서울역 3층 커피숍에서 종부 최모 씨와 충무공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모 씨를 만났다.

고택 땅이 경매로 나온 이후 비난 여론에 시달려왔고 또 이어 터진 유물 유출 의혹으로 마음고생을 해온 터여서인지 처음에는 몹시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그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말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최씨는 인터뷰 도중 세 번이나 눈시울을 붉히며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돌아간 남편 이야기를 할 때와, 여섯 살 난 종손 이야기를 할 때였다. 4시간 반에 걸친 긴 인터뷰는 “내게 악의를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죄하면 용서를 받아줄 수 있다”는 종부의 말로 끝났다.

- 우선 껄끄러운 것부터 묻겠습니다. 유물 유출 소문의 진상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유출된 유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 대학 간부인 L씨(이번에 종부를 고소한 당사자)와 사업을 추진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충무공기념사업회를 하고 싶어하는 제게 상당한 자금과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J씨를 소개했습니다. H씨와 저는 J씨와 함께 대학 소유 건설사의 경영을 넘겨받아 기념사업의 발판을 마련하기로 하고, 3월15일 한씨(충무공기념사업위 추진위원장)가 그 회사의 대표가 되고 J씨가 최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J씨는 기념사업을 하기 위해 중부의 모든 재산과 유물을 맡긴다는 위임장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래서 제가 앞으로 생길 재단에 위임하는 형식으로 위임장을 써준 것입니다. J씨는 충무공의 탄신지인 명보극장(옛 건천동) 뒤편의 땅을 모두 사 기념관을 짓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J씨가 ‘종가집에 150억 원을 건네줬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고 다녔으며 ‘기념사업회를 하면 돈세탁을 할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해서 일단 급히 사업적 관계를 끊었습니다. 건설회사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회사를 대학 쪽에 돌려줬습니다. 유물 기증 약속도 물론 취소했습니다(L씨는 최씨가 빌린 투자금을 갚지 못한 점을 들어 그를 고소했다. 그는 모 대학 내에 L씨 처벌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걸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명예훼손 혐의가 추가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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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가문의 종부가 소유하다 경매를 통해 이순신의 조부인 이백록 문중의 풍암공파 종회로 소유권이 넘어간 아산 현충사의 이순신 고택 터.

미공개 105점 문화재청 기탁

- 그렇다면 모 대학 총장 방에 걸렸다는 충무공 영의정 교지는 어떻게 된 겁니까?
“L씨는 모 대학에 이순신 기념관을 짓겠다고 말했지요. 그 공사 허락을 대학 총장에게 받아내려면 유물이 어떤 것이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면서 하나만 가져오라고 말했지요. 그래서 2006년 가을 진주박물관에 전시했던 영의정 교지를 바로 거기로 들고 갔습니다. 액자 속에 들어있어 힘들게 옮긴 기억이 납니다.

비서실장 L씨는 그것을 사무실 벽에 세워뒀는데 어느 샌가 총장 방에 걸었다고 하더군요. 돌려달라고 했더니 대신 모사품이라도 걸어주고 떼어 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미루더군요. 2008년 8월 L씨가 중국에 갔을 때 비서실 여직원에게 떼어 달라고 해서 인수증을 써주고 떼어왔습니다.”

- 지금 유물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 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도난 우려 때문에 장소는 공개하지 못합니다.”

- 미지정 유물은 문화재청에 넘기기로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유물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고 기탁한 것입니다. 기탁은 소유권을 넘기는 기증과 다릅니다. 소장자가 소유권을 유지한 채 보관 관리권만 다른 기관에 넘기는 것이 기탁입니다. 이번에 기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유물을 임의처분할 수 있다는 세간의 우려를 씻기 위해서입니다.

2008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로 미지정한 유물을 새롭게 지정하자는 요청이 있었는데, 기념관을 지으면 거기에 전시 보관하려고 미뤘습니다. 그런데 이번을 계기로 다시 문화재청과 협의해 유물 105점(보물급 5점 포함)을 실사했습니다. 담당 전문가들이 와서 진품을 확인하고 목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이미 끝냈습니다. 보존처리 절차를 거쳐 일반공개도 하겠다고 문화재청에서 밝혔습니다.”

- 유물 처분 문제와 관련해 문중과 다시 소송이 붙었지요?
“예. 일부 언론에서 J씨가 흘린 말을 믿고 제가 마치 유물을 팔러 다니는 사람처럼 썼더군요. 하지만 개인적 필요나 목적으로 충무공 유물을 내놓은 적은 전혀 없습니다.

이번에 문화재청 기탁으로 ‘임의처분’ 문제는 해결됐다고 봅니다. 지금 종회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 유물의 소유권이 종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4대 종손인 시아버지와 15대 종손인 남편이 대대로 소유해온 것인데 당연히 16대 종손이 상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경매로 고택 땅이 넘어갔습니다.
“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종가의 체면과 종부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는데…. 조상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양자 윤용이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제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여섯 살짜리 아이가 뿌리가 없는 아이니 어쩌니 하는 것입니다. 윤용이는 시아버지(이응렬)께서 종손으로 세우라고 육성녹음까지 해놓은 유언에 따라 들인 양자입니다. 지난해 돌아간 시동생(윤용의 아버지 이재엽)은 제가 시집올 때 어린아이였지요. 착하고 반듯했습니다. 시아버지께서 늦게 둔 자식입니다.

그 생모는 어느 암자의 여승이었다고 해요. 암으로 돌아가셨지요. 종친회에서 시동생을 자꾸 폄하하는 것은 종손을 거기서 차지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저의 종부 자격을 박탈하고 종친회에서 어찌한다고 해도 종가는 어쩔 수 없이 종가입니다. 12년마다 족보를 리뉴얼할 때 재국 씨 아들로 윤용이를 올리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세월이 해결할 문제입니다.”

- 지금 윤용이는 어떻게 키우고 있나요?
“온양에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있어요. 아침에 거기에 보냈다 어린이집에 가지요. 그리고 저녁에 찾아옵니다.”

- 재국 씨와 결혼할 때 상황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1984년 음력 8월에 제가 이 종갓집에 들어왔습니다. 친정의 우리 할머니가 시집은 양반댁에 가야 한다고 권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결혼식도 안 올렸지요.

제 결심은 그랬습니다. 이 사람의 질환(정신장애)을 고치고 식을 올려야지. 그래서 5년 동안 치료에 매달렸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보냈는데 약이 독해 오히려 더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또 아이들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는 말을 듣고 모시고 나왔습니다. 영동세브란스에 갔다 나중에 그 담당의사가 신촌세브란스로 옮기는 바람에 거기로 옮겼습니다.

5년쯤 지났을 때 정말 시장을 같이 다니고 택시 요금도 스스로 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온양 온천에 가서 돈 주고 때밀이를 부르기도 했지요. 그 무렵 결혼식을 했습니다. 온양 제일호텔에서 뷔페로 했는데(그때는 호텔 결혼식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충무공 기념사업을 한다고 했지요.) 종갓집 결혼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무척 많이 왔어요. 음식을 600명 분 준비했는데 한참 모자랐던 기억이 납니다.”

- 어떻게 재국 씨와 결혼할 생각을 하셨는지요?
“당시 재국 씨는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환자가 아니었어요. 연세대 법대에 다니다 질환이 왔는데, 인물도 좋고 키도 훤칠해서 아주 멋진 사람이었죠. 부잣집에서 자라 성악도 하고 태권도도 배웠던 사람이죠.

경기고 시절 친구들을 보면 쟁쟁하죠. 아마도 ‘병’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정가의 유명인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저는 이 사람을 꼭 회복시키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동정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사랑이 되더군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다른 것은 참아도 돌아간 남편을 바보 천치로 만드는 것은 용서가 안 돼요.

결혼기념일에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고, 대전에 있는 공원으로 1박2일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던 기억도 생생해요. 이 사람 신수가 좋아 50이 넘었을 때도 야한 옷도 하나도 안 야하게 느껴졌어요. 흰 바지에 자주색 티셔츠를 입혀드리고 구두를 신겨 모시고 다녔죠.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 구두를 안 신으려고 하더군요.

몸이 아프니 구두가 힘겨웠던 거예요. 그런데도 저는 멋진 스타일을 갖췄는데 거기에 운동화를 신으니 속상하더군요. 결혼하고 한 10년 동안 뒷바라지하다 보니 마음이 지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죠.”

- 처음 시집 왔을 때는 문중에서도 고맙게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그랬지요. 친정에서 3년간 살림 배우고 29세에 시집왔죠. 재왕 시동생(종친회장)도 지금은 저렇게 됐지만(소송으로 불화) 예전에는 옷을 살 때도 내가 사주면 동서가 사주는 것보다 더 즐겨 입었지요.

제가 육개장을 해 돌리면 조카들이 ‘엄마가 했어? 종갓집 새엄마가 만든 거지?’하고 벌써 다 알아요. 충무공파 부인네들끼리 송죽회(松竹會)를 만들기도 했죠. 기차를 타고 놀러 다니고, 빈대떡과 김밥·시래기찌개를 싸가서 서로 나눠 먹었습니다. 시아버님은 저를 종가의 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까지 집안이 외롭고 웃음이라고는 없었는데 며느리가 들어와 동서 12명 모아 먹이고 생일 돌아오면 노래방도 데리고 다닌다고 기뻐했지요. 시어머니는 우리 먹으라고 늘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두셨습니다. 매점 이름을 ‘노느매기’라고 지은 사람은 저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나눠 먹이는 일을 천성적으로 좋아해 그것을 가게 이름으로 쓴 것입니다.”

이순신사관학교 창설의 꿈

- 사업은 어떻게 해서 하게 됐습니까?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현충사 매점 주위에 다른 ‘부스’들이 생기는 바람에 이제 수입이 부족하니 뭔가 해보라고 하셨어요. 1998년 웨딩사업을 시작했지요.

그때 종업원 중에서 현재의 L씨를 아는 사람이 있어, 인연이 맺어졌죠. 2003년부터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충무공기념사업을 구상했던 거죠. 경기 사정으로 건설이 중단되는 바람에 곤경을 겪고 있지만, 무리한 투자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 충무공기념사업회는 왜 하시려는 건지요?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뜻을 살리고 싶어서죠. 장학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도 돕고 싶고, 민족사관학교처럼 이순신사관학교를 만들고 싶기도 해요. 충무공의 종갓집과 종손인 윤용이를 지켜줄 보호막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에요. 사실 종중이 있지만 장학금도 종손에게 주는 것은 없습니다.

문화재청도 정작 필요할 때는 도움을 주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스스로 종가를 지킬 단체를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재 법인 신청을 준비 중입니다. 서울에서 출범할 것이고, 정계·학계·교계·군 등 25명을 이사급 준비위원으로 위촉해 놓았습니다. 이사회도 두 차례 열었습니다. 회의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 교회 신자이면서 종갓집 제사를 지내는 일이 상충하는 것 아닌지요?
“사실 충무공을 신격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사는 문화행사로 이해합니다. 최근에는 종친회와 소송이 붙어 있는 상황이어서 그들을 만나는 일이 괴로워 낮에만 잠시 가고 제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수비용은 꼭 댑니다. 아 참, 그리고 시제사에는 원래 종손이 안 갑니다(종부 불참을 꼬집은 언론보도에 대한 해명인 듯).

산지기들이 지내는 행사입니다. 그리고 종가문제를 놓고 외부에 대고 욕을 하는 것은 종인들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나쁜 여자 만든다고 종친회가 폼이 나겠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이 문중에 대고 잘한다고 박수를 치겠습니까? 저 같으면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 요즘 심경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저는 참 남자 같고 배짱이 좋아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런 일들을 겪고 보니 모두 내 마음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물질적으로 힘겨워 사업을 더 벌이기도 어렵습니다.

한때 잠깐이나마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자존심 하나로 견뎠습니다. 그래도 저는 종부이고, 한번 종부는 영원히 종부입니다. 제 원칙은 그렇습니다. 저는 돈 때문에 억울해 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신뢰가 깨지고 상처를 준 일에 대해 대응하는 것입니다. 제가 충무공을 선양하려는 사업을 하려고 하면서 거짓으로 무엇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진실은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에 대해 악성 댓글을 다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진짜 옳은 것이 밝혀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렵니다. 우리 시아버님을 욕되게 하는 말들, 남편을 깎아 내리고 아들을 의심하는 발언들. 모두 사실과 다릅니다. 종갓집에 자신의 의지가 아닌 채 입양돼 ‘기획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윤용이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글■이상국 자유기고가 [isom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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