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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걸려 독일 따라잡은 한국 문맹은 퇴치했지만 독서율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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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한나의 수치심은 그녀가 나치 앞잡이로 활동하던 1940년대 독일 사회에 문맹자가 극히 드물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문맹률이 제로에 가까운 요즘 한국인은 한나의 수치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가 나치에 부역하던 40년대의 한국인이 이 영화를 봤어도 지금 우리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45년 해방 당시 13세 이상 인구 가운데 한글을 전혀 읽거나 쓸 수 없는 문맹자는 77%에 달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한국전쟁 때만 해도 한글을 몰라 전우에게 편지의 대필을 부탁하는 예가 많았고, 휴전 후 오랫동안 신병훈련소에는 ‘가나다’를 가르치는 한글 교육과정이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군대에 입대하고 난 후에야 한글을 익히고 비로소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이즈음의 한국인에게 문맹은 아주 흔한 일이어서 종신형까지 감수한 한나의 행동은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이 본격적으로 문맹퇴치를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으로 국토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은 프로이센은 국민 교육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프로이센은 1825년 병역의무처럼 교육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해 강제성을 띤 교육제도를 실시했다. 그 결과 프로이센 중심으로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인 1860년대 적령기 아동의 초등학교 입학률은 97.5%로 증가했다. 1870년 프랑스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둔 몰트케 장군은 “프로이센의 승리는 일찍이 초등학교 교단에서 결정됐다”고 말했다.

1860년대 100%에 가까운 초등학교 입학률을 보인 독일이었으니 1940년대의 한나에게 문맹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을 게다. 우리는 후발주자로서 뒤늦게 문자해독률을 끌어올린 경우다. 지난해 12월 국립국어원 발표에 의하면 한국 성인남녀의 문맹률은 1.7%였다. 한나의 수치심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2008년 10월 서울시민 대상 조사에서 “지난 1년 동안 교양서적을 몇 권 읽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5.5%가 “한 권도 없다”고 답한 우리 현실은 미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한다. 이제는 문맹률 아닌 독서율이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