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아브라함 자손들 ‘공존의 길’을 묻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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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08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5일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서 열린 환송 행사에서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교 지도자를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전 세계인들은 8일부터 교황이 보내는 평화·화해·관용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이번 중동 방문에서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의 성지를 차례차례 찾아 종교 간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을 촉구했다. 그는 “이번 방문은 내게 있어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깊은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기회”라는 말로 요르단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무슬림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유대교·무슬림이 한 형제라는 것도 강조했다.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봤다는 니보산에 가선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오해로 얼룩진 역사라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있다. 이제는 신을 충실히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상대를 서로 알아가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람 사원인 ‘빈 탈랄 모스크’ 방문은 요르단 방문의 하이라이트였다. 그곳에서도 이슬람과의 화해 노력을 강조했다.

“기독교·유대교·무슬림은 유일신을 믿는 한 형제”

11일 이스라엘에 가선 유대교와의 화해를 꾀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유대교 성지인 ‘통곡의 벽’을 방문했으며 유대교 최고 랍비 두 명과 만나 “가톨릭 교회는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진정하고 영속적인 화해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사렛에서는 유대교·이슬람 지도자들과 수태고지 교회에서 모임을 열고 “여러 종교 지도자가 서로 존중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꿈을 공유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유대 성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내려주셨다’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때보다 갈등 악화
베네딕토 16세의 중동 방문 궤적을 따라가면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중동 방문 일정(2000년 3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은 이슬람 성지인 ‘바위 돔 사원’에 교황으로선 처음 들어갔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는 물론 비(非)신자들 사이에서까지 인기를 누리던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은 중동권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방문의 배경에는 첨예한 종교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상당 부분은 교황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 2006년 그는 독일 뢰겐스부르크 대학에서 강연하던 도중 “모하메드가 가져온 것은 모두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들 뿐”이라고 말한 14세기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2세 황제의 말을 인용했다. 당연히 이슬람권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이 사건으로 중동 지역에서는 교황 화형식까지 발생했다. 기독교인 집이 공격받아 불타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해 11월 교황이 이슬람 국가인 터키를 방문했을 땐 교황을 위해 특수 방탄 차량이 동원됐고, 교황 자신은 방탄조끼까지 입어야 했다. 유대교와의 관계도 악화일로였다. 2007년 교황이 라틴어로 이뤄지는 트리덴티노 미사를 허용한 게 시작이었다.

예수 수난일에 사용되는 트리덴티노 미사의 기도문에는 유대인들의 개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교황이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방관했던 피오 12세(1876~1958년)의 시복(諡福: 교황이 사망자를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선언하는 것) 절차를 진행하다가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올해 초에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했던 영국의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면서 또다시 유대교와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중동에 전운이 감돌면서 국제 정세도 녹록지 않았다. 2002년 분리장벽 설치, 연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등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우려 딛고 성공적 방문 평가도
교황의 중동 방문 초기만 해도 비판적인 시각이 팽배했다. 9일 요르단의 후세인 빈 탈랄 모스크에 신을 벗지 않은 채 들어간 것이나, 11일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의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교황의 중동 방문 가치를 폄하하게 만드는 재료가 됐다. 하지만 그는 14∼15일 종교 간 화합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파했다. 이스라엘 ‘바위 돔 사원’에는 신을 벗고 들어가 9일의 실수를 만회했다. 귀국 길에 오른 공항에서 “홀로코스트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잔인하게 절멸됐다”고 표현해 유대인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정치 현안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캠프를 방문해 “내 마음은 집 없는 모든 가족과 함께 있다”며 난민들을 위로했다. 팔레스타인 주권국가 수립에 대한 강한 지지도 표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많은 청년에게 호소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폭력이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용기를 가져 달라”며 피로써 피를 부르는 분쟁 종식을 촉구했다.

교황의 중동 방문이 끝난 뒤 여론은 호의적인 편이다. 유대교 랍비인 예키엘 엑스타인은 16일자 월스트리트저널에 “세계는 화해의 모델을 필요로 한다”며 “교황의 중동 방문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영적인 힘이 평화를 이룰 실체”
독일인인 그는 24년간 교황청의 신앙 교리성 장관을 지낸 신학자 출신이다. 10대 시절 나치 군에 복무했던 경력은 꼬리표로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비록 강제 징집됐고, 나치의 만행에 반대해 탈영까지 했지만 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톨릭 개혁에 앞장선 전임 바오로 2세와 비교되는 일이 잦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출신으로 동유럽 해방과 아시아·아프리카 교세 확장에 힘을 쏟았다. 아버지 같은 온화함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유럽과 중남미를 휩쓰는 세속주의에 맞서 기독교 정신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자임한다. 6세기 성 베네딕토가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 수도원을 세운 것처럼, 베네딕토 14세가 18세기 계몽주의의 회의적·이성적 세계관에 맞선 것처럼….

그는 신의 뜻보다 개인 이익을 앞세우는 개인주의·세속주의에 맞서려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예수의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그의 과제다. 세속주의 물결 속에서 갈수록 유럽 등 일부 지역에서 가톨릭 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도 막아야 한다. 특히 성지인 이스라엘에서는 젊은 기독교인들의 이탈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도들의 유무형 압박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그는 교회의 힘은 신도의 수가 아니라 교리의 힘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번 중동 방문을 시작할 때 “우리는 정치 권력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이다. 이 영적인 힘은 평화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체다’라고 말했다. 종교가 중동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종교가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중동 방문도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가 이번에 강조한 종교 간 화합은 적어도 종교를 내세운 전쟁과 갈등의 명분을 약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베네딕토 교황의 중동 방문은 유대교와 무슬림이 관계를 정상화하고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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