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고물들이 정겨웠던 공간, 삼청동이여 안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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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12면

문 닫기 하루 전인 15일 밤 라이브 공연이 한창인 서울 삼청동 재즈스토리. 천장 오른쪽에 하얗게 붙어 있는 것은 재활용품인 스티로폼이다. 최정동 기자

서울 삼청동 재즈스토리의 밤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15일,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는 오후 8시30분에 맞춰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10시를 넘어서자 입구에서 안내를 기다리는 줄이 길어졌다. 20대에서 중장년까지, 10여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직장인에서 오붓한 연인·부부까지 각양각색 손님들이 이미 10여 개 테이블을 잔뜩 메웠기 때문이다. 다른 일행과 합석은 기본이다. 비좁은 틈새에 보조의자로 끼어 앉아야 하는 불편에도 누구 하나 별 불평이 없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눈높이 코앞에서 펼쳐지는 연주를 저마다의 몸짓과 장단으로 즐기는 데 제각각 열중할 뿐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 역시 제각각이다. 맥주병·와인잔은 물론이고, 양은냄비에 담긴 팥빙수도 있다. 낡은 분위기가 역력한 실내에는 어느새 생기가 가득하다. 불과 이틀 뒤면 추억으로 사라질 풍경이란 걸 잊게 했다.

15년 만에 문 닫은 명물 카페 ‘재즈스토리’

밤마다 라이브 공연, 추억 속으로
“내일 문을 닫는다고요? 정말요? 오랜만에 왔는데…정말 아쉽네요.” 음악을 즐기던 30대 직장인은 기자의 전언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골 중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부지런을 떤 이들도 있다. 초저녁부터 테이블을 차지한 30~40대 네 사람은 “자리가 없어 허탕을 친 적이 많다. 오늘은 일부러 일찍 왔다”고 했다. 공연동호회 회원인 이들은 “무정형의 분위기가 이 집의 매력”이라며 “삼청동의 명소였는데, 다른 어디서 이런 분위기가 나겠느냐”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20대 젊은이들이 주축인 하우스밴드의 첫 무대에 이어 두 번째 밴드로 등장한 ‘사랑과 평화’ 역시 그런 듯했다. 모처럼 이 집 무대에 선 이들은 “내일 속초에 공연이 있다니까, 주인이 살살 (공연을) 하라더라. 하지만 무대에서 살살 하는 게 어딨느냐”면서 약속된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재즈스토리는 1994년 9월 문을 열었다. 서울에 라이브 공연을 즐길 공간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무렵이다. 삼청동도 요즘과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 가게가 들어서고,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든 젊은이들로 북적이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94년부터 재즈스토리를 운영해 온 주인 임애균씨.

“개발이 안 돼서 오래된 느낌, 도심이 아니라 시골 같은 느낌이었죠. 어렸을 때 삼청공원에서 놀았던 기억도 있고.”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재즈스토리를 운영해온 주인 임애균(51)씨의 말이다. 그는 “한국에는 왜 이런 데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돌이킨다. “음악 하는 아는 분들에게 이런 집을 해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고요. 노래방이 생겨나고, 나이트클럽도 음반을 트는 마당에 라이브 공연을 하는 집이 되겠느냐고, 망할 거라고.”

대학로서 새 ‘재즈스토리’ 열어
결과는 달랐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돼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새 가게라고 상상하기 힘든 인테리어 역시 눈길을 모았다. 곧 쓰러질 듯한 낡은 외관도 그랬지만, 실내 역시 처음부터 온갖 잡동사니 폐품·고물로 꾸며졌다. 15년의 세월이 더해진 현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손님들이 앉은 안락의자는 해지고 닳은 자리마다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감겨 있다. 직사각형 유리테이블은 어느 건물의 출입문이었던 듯, 가장자리에 달린 문손잡이가 그대로다. 시대를 앞서간 재활용 인테리어 컨셉트는 90년대 소비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왔다. 주인 임씨는 “새로 좋은 게 생겼다고, 새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예전 세간을 내다버리곤 하는 게 너무 아깝기도 했고, ‘저 사람들은 추억도 없나’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재즈스토리의 인테리어는 때이르게 작고한 건축가 차운기씨의 솜씨로도 알려져 있는데, 임씨의 설명은 좀 다르다. “운기씨가 했으면 더 잘했겠죠. 남편 친구였어요. 처음에 일을 맡겼는데, 다른 건축일 때문에 제대로 진행이 안 됐죠. 남편이 하나씩 직접 하면서 시간이 한참 걸렸어요.”

임씨는 10대 때 이후로 한국의 부모와 떨어져 외가가 있는 일본에서 살았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돌아온 것은 90년대 초다. 병약했던 어머니가 일본으로 전화를 걸어 “한국에서 함께 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 계기가 됐다. 재즈스토리가 처음부터 주업이었던 건 아니다. 외가에서 하던 건설업에 더해, 서울 마포에 앤티크 인테리어 가게도 운영했다. 그 가게의 상호 역시 ‘재즈스토리’였단다. “도쿄 우에노 공원 근처에 재즈 카페가 있었어요. 문을 열면 ‘쉿’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들어가 보면 손님이 두 세 명뿐이에요. 그런데도 얼마나 열심히 연주하던지. 나중에는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 집이 됐죠.”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도 다녀가
종업원도 없이 시작한 재즈스토리가 바빠지면서 임씨는 2년 만에 다른 사업을 접었다. “이런 가게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하나도 몰랐죠. 처음에는 손님들이 배고프다면 밥을 볶아서 내오고, 술을 달라면 근처에서 사오는 식이었죠. 힘들어서 몇 번 쓰러지기도 했고요.” 속된 말로 ‘뭘 몰라서 용감했다’고 할 만한 경우다. 임씨는 재즈스토리의 초창기 무대에 국내 음악인들은 물론, 비용을 들여 데려온 외국인 밴드를 세웠다. 취업비자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으니, 따져 보면 역시나 ‘불법’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뒤섞여 연주를 하면서 갈수록 실력 있는 국내 젊은 연주자들이 늘어간 것은 임씨가 자랑하는 수확이다. “이 무대에서 출발해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름은 ‘재즈’스토리이되, 이 집의 레퍼토리는 올드팝·가요 등 자유롭다. 임씨는 “듣기에 좋으면 좋은 음악 아니냐”며 “장르를 나누는 걸 싫어한다”고 말했다.

땅 주인 바뀌며 문 닫기로 결심
이 독특한 공간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도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도 96년 내한공연을 왔던 길에 재즈스토리를 방문했다. 국내 문화예술인은 물론이고 기업인·정치인들의 발길도 적지 않았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외관과 단연 대비되는 이력이다. 임씨는 간판을 걸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에 다니러 와서 이 집 참 좋다, 했던 가게들이 이듬해 와 보면 없어지곤 했어요. 적어도 10년은 해야 간판을 내걸겠다고 마음먹었죠.” 사실 임씨의 꿈은 10년, 아니 15년도 성에 차지 않는다. “여기서 만나고 사귀어서 결혼하고, 그렇게 낳은 자녀가 중학생이 된 분들도 있어요. 그 자녀의 자녀까지 올 수 있는 집, 없어지지 않는 집을 하고 싶었는데.”

임씨에 따르면, 임차로 시작한 재즈스토리 터에 그사이 새 땅 주인이 생겼다. 적잖은 마음고생을 겪은 끝에 임씨는 16일 밤 공연을 마지막으로 삼청동 재즈스토리를 닫고, 아예 철거하기로 했다. 이미 대학로에 ‘재즈스토리’라는 같은 이름으로 새 가게를 열어두기는 했지만, 주인이나 손님이나 마음이 삼청동 같지는 않다. 혼자 온 정장차림의 외국인은 문 닫는 소식이 금시초문인 듯 탄식을 터뜨렸다. “역사를 지닌 이런 유명한 곳이, 서울의 문화적 아이콘인 이런 곳이 왜 없어지느냐”면서 “슬프고도 끔찍한 소식”이라고 말했다. “퇴근길에 자주 여기를 찾는다”는 그는 “마지막 공연이라니 내일 꼭 와야겠다.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한 차례 손님들이 빠져나갔다. 무대 쪽에서는 세 번째 밴드가 연주 준비를 서둘렀다. 뒤늦게 온 손님들이 먼저 자리한 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부산한 목소리 사이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재즈스토리의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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