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미의 열린 마음, 열린 종교] 8. 시크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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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에 잠긴 라크빈다 씽. 그는 고향 펀자브가 인도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정대영(에프비전 대표)

시크교(Sikh)는 세계 한 지역에서만 뚜렷하게 믿는 소수 신앙 가운데 하나다. 인도 인구 10억명 중 2%가량이 시크교도다. 인도 서북부 펀자브에 부족신앙 비슷하게 퍼졌으며, 같은 인도에서도 타지 사람에겐 신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시크의 뜻은 '제자'다. 우두머리는 구루로, '지도자' '스승'을 가리킨다. 구루는 죽어서도 구루로 환생하며 대대로 이어지기에 시크교를 '구루의 종교(the religion of Gurus)'라고도 부른다.

교조인 초대 구루 나나크는 1469년 펀자브의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펀자브는 힌두교를 믿었지만 이슬람이 통치하면서 두 종교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나나크는 인도 전역을 돌며 "힌도교도, 이슬람도 없다"고 설파했다. 두 종교의 장점을 통합한 것이다.

예컨대 이슬람에서 유일신을 가져와 '와훼구루'로 불렀다. '참된 이름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러나 신은 존재할 뿐 형체가 없으므로 신에 대한 의식.제식, 우상숭배를 없앴다. 힌두교에선 윤회와 업을 받아들였다. 반면 힌두교의 '단점'인 카스트제도.여성차별 등의 철폐를 주장했다.

전 세계에 퍼진 시크교도는 8000만명 정도다. 어디에 살든 '구루 드와라'라는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나 아직 서울에는 시크교 사원도, 공동체도 없다. 시크교도는 외관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긴 수염에 머리엔 터번을 쓰고 이름 뒤에 항상 '사자(lion)'라는 뜻의 성(姓)인 싱(Singh)을 붙인다. 한국에 터번을 쓴 시크교도는 세 명에 불과하나 싱이라는 성을 가진 시크는 300여명에 이른다.

서울에 사는 라크빈다 싱. 펀자브 출신으로 덩치가 큰 그는 머리에 터번을 쓰고 있다. 뉴델리의 네루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에서 한국학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학위를 따면 귀국 후 교수가 되기가 수월하다고 한다.

그는 파란색 터번을 쓰고 있다. 색깔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지 "알리바바 아니세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웃었다. 시크교도는 영(靈)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자르지 않는다. 그 역시 태어나 지금까지 머리카락을 자른 적이 없고, 일과 중 가장 큰 일이 머리 빗질이라고 했다.

"신은 사람의 모습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신을 형상화해 숭배하는 의식을 금합니다. 우리는 구루의 가르침에 따라 가정 생활과 정직한 노동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생사 윤회를 끊고 와훼구루와 하나가 되지요."

노동을 중시하기 때문일까. 시크교도는 인도에서도 부유층에 속해 군인.공무원.상인.학자.변호사.의사가 많다. 시크교도에게는 다섯가지의 준수 사항이 있다. 첫째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고 터번으로 덮을 것. 둘째 가난한 이와 수입을 나눌 것. 셋째 오른손 손목에 쇠로 만든 팔찌를 찰 것. 넷째 짧은 바지를 입을 것. 다섯째 반드시 단도를 몸에 지닐 것. 그가 칼을 차야 하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무사의 정신을 지켜나가자는 의미에요. 우리에겐 반항 정신이 강한데 싸워서 해결하자는 것이죠. 우리는 독립된 자치주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겁니다."

종교의 역사엔 아이러니가 많다. 이슬람과 힌두교의 갈등을 잠재웠던 시크교가 갈등의 씨앗이 된 것이다. 한때 왕국까지 이뤘던 시크의 고향 펀자브는 제2차 대전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며 인도 땅으로 편입됐다. 현재 10개의 시크 무장단체가 독립 자치주와 왕국 재건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다.

그도 손을 불끈 쥐었다. "우리는 계속 싸울 겁니다. 우리만의 왕국이 재건되는 날까지." 평화의 길은 없는 것일까. 그들의 하나님 와훼구루가 중재자가 될 순 없을까.

김나미 <작가.요가스라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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