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게 띄우는 편지]정치인 틀 벗고 행정가로 거듭 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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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처 축하의 인사를 받기에도 숨가쁜 상황에서 '국민의 정부' 를 출범시키게 된 대통령에게 격려의 인사부터 드립니다.

새 정부는 헌법상으론 6공 제3기 정부에 해당합니다.

6공 제3기란 노태우 (盧泰愚) 정권의 3기란 뜻이 아니라 헌법적 의미인 것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 없이 국가를 이끌어 가야 하는 형편임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새로운 시작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분명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해는 건국 50주년이면서 동시에 국가사적으론 제3기의 시발 연도에 해당합니다.

48년부터 60년까지의 건국기를 거쳐 잠시 과도기를 겪고나서 61년부터 87년까지가 발전기였습니다.

김영삼 (金泳三) 정부는 그 기초 위에서 본격적인 구조개혁을 해야 했던 것이나 아깝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아 오늘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이 과업은 새 정부로 이양됐고 그 원년이 바로 금년입니다.

예와 마찬가지로 이 제3기라는 것도 그냥 시간을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시켜야 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업은 빨라도 한세대는 거쳐야 무언가 이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데, 대통령께서는 비단 내각제 개헌을 안한다고 해도 5년이라는 시간 밖에 갖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임기 3년에 해당하는 2001년까지 국제통화기금 (IMF) 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있습니다.

그 뒤 남은 2년은 또 대선문제로 제대로 일하기가 어려워지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앞으로 3년간은 지금의 난국을 수습하는데 족히 다 쓰일 판입니다.

그러나 불만스러워 하실 것은 없습니다.

길만 잘 닦아 놓으시면 그것으로 훌륭한 업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시행착오를 해볼 여지조차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을 생각하며 몇가지 부탁드립니다.

대통령께서는 직업정치인으로 대통령이 되신 두번째입니다.

또 그것도 야당 출신으로서 입니다.

직업정치인이란 대선때 말씀하신 용어를 빌려 쓰자면 돈이라는 실탄을 모아 바람몰이를 하는 사람으로, 흔히 정치자본가라고도 일컬어지며 경세가와 구별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직업정치인이 대권을 잡게 되면 흔히 제1성으로 정치는 웬만큼 알아도 행정은 잘 모른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때 행정과 구별되는 정치란 야당 출신의 경우 투쟁차원의 정치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통치차원에선 정치와 행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통령 차원에서 잘못 인식된 결과가 오늘의 위기를 가져온 근본원인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이 점에 관해 직업정치인, 그리고 야당 지도자였던 대통령께서는 깊은 고려가 있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치 일반에 해당되기도 합니다만 특히 야당 지도자는 국민의 망각능력을 정치자산으로 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시고 나면 이런 국민은 갑자기 기억의 천재로 변해 그런 자산에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태우 전대통령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여소야대의 짐을 안고 출발하시게 된 것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당시 김대중대통령께서는 제1야당의 당수였으므로 상대쪽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제 절실히 느끼실 것으로 압니다만 이런 사태는 아직 민주제도가 정착됐다고 하기엔 이른 한국정치에서 보통 우려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 (非) 서방의 대통령제 국가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때 경험했던 헌정사의 쓰라린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이 점에 관한 대통령의 특별한 지도력 발휘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는 또한 역대 몇몇 대통령들의 불행을 되씹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불행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근래의 경우를 보면 대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해 보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께서 가지고 계시던 아태재단이 다른 가족의 손에 정치유산처럼 넘겨졌다고는 하나 혹시 퇴임후를 생각하신 조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한사람의 기우에 불과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말썽의 소지를 조금이라도 안고 있는 것은 다 버리시길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소한 문제들은 이나라 현대정치사의 전체를 경험하신 분으로서 그 역사 전체가 반면교사이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는 이제 그 전체의 역사에서 떠나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난 역사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통 어려운 부탁이 아니겠으나 지금의 한국으로서는 그 코페르니쿠스적인 변신에 대한 기대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개발연대의 대통령도 아니고, 과도기의 대통령도 아니며, 단순히 경제적 곤란만을 수습해야 하는 대통령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새로이 만들어야하는 선두에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승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노재봉〈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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